➲ 예수님의 이적 03_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심
마태복음 17:14-21
믿음이 없는 세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이적은 마태복음 외에도 마가복음 9:14-29, 누가복음 9:37-43a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서 전체가 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 산 위에서 변화되신 것을 보여주신 사건의 문맥에 두고 있다. 즉 변화되신 것을 보여주신 후 산 아래에 내려오셔서 행하신 이적이다. 그렇다면 산 위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정리를 하여야 본 이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의 본문은 마가의 본문에 비해 아주 짧게 기록하였는데 누가는 대체적으로 사건 위주로 기록된 것에 반해 마가는 이적이 베풀어진 상황에 대해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는 짧게 기록하였지만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마가와 누가의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우리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본 이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16:28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하시고 세 제자를 따로 데리고 산에 올라가 영광스럽게 변화하신 것을 통해 실제적으로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눈 대화를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눅 9:31)에 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을 유대와 갈릴리 사역을 교차해서 기록하였지만 공관복음서는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기점으로 유대를 향해 올라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는 것으로 기록한다(참고 눅 13:33). 이방 땅과 같은 갈릴리에서 성전이 있는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하는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란 모세와 엘리야가 간절히 원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모세와 엘리야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은 진짜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언약 성취가 십자가라는 의미이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눅 9:36)라는 말씀에서 십자가를 지실 분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에게 이르렀을 때 귀신 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이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4-16절). 마가는 이 일로 인하여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다고 밝힌다(막 9:1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17절)라고 하셨다. 마가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막 9:19)라고 기록하였고 누가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눅 9:41)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변화 산 위의 모습과 변화 산 아래의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산 위에서는 예수님께서 변모하여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진 영광스러운 모습이었기에 그곳에서는 실제 믿음이 나타난 곳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산 위에서는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산 아래는 믿음이 없었기에 패역한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산 위에서는 출애굽 때에 모세가 시내 산에 세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언약의 말씀을 받는 모습(출 24:1,9)을 그대로 예수님께서 재현하여 실제 그 언약을 성취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또한 모세가 산 아래에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여호와로 섬기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출 32:1-35)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지 못하는 것은 마귀의 권세에 붙잡힌 패역한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후에 모세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신명기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신 32:17-20)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들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인 것처럼 지금 산 아래의 사람들 역시 심히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패역한 세대”란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방탕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 매여 믿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믿음이 없기에 부패하여 뒤틀려져 왜곡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것을 왜곡하고 비뚤게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진리의 말씀을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의도하신 뜻대로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셨고 또한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를 깨닫도록 하셨다(딤후 3:16-17, 고전 2:10-14). 이런 점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6-17).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신 말씀과 연관하여 20절에서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하셨다. 이는 마가복음의 기록에서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하시자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20절에서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다음에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패역한 세대답게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우리에게 조그만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을 옮길 뿐만 아니라 못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앞의 산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마귀의 온갖 방해 공작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산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여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산”은 ‘권세’나 ‘힘’을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고 파괴하실 것이라고 할 때 산은 하나님의 언약에 도전하는 인간의 나라나 세상의 권세를 지칭하는 것(욥 9:5, 렘 51:25, 사 40:4, 암 9:13 등)이며 반면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며 언약을 주시는 곳으로 지칭할 때 ‘성전’ 혹은 ‘시온산’을 의미한다(창 22:1-19, 출 19;20, 대하 3:1, 사 2:2, 시 2:6 등).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강론과 변화 산의 변모는 언약의 온전한 성취인 십자가의 사건을 앞당겨 미리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폭로한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존재라면 곧 이스라엘의 실패를 담고 있어야 하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마태는 마가나 누가의 복음서에는 언급하지 않은 이 말씀을 기록하여 일차 독자인 유대인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있는 자가 이스라엘 중에 있었는가? 진짜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 오직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의 믿음으로 산을 옮기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고 그들도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1-22)
무화과나무에게 된 일이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을 말한다.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믿음에 의해 누리게 되는 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변화 산 위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왕국의 영광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한 것이 아니며 패역한 세대의 자기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누리게 되는 복이다. 이런 점에서 마가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믿는 자”란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신 것이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전에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부여받은 적이 있었고 또 이 이적 이후 70명의 파송에서도 그 권세를 드러낸다(마 10:1,8, 눅 10:17-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다음 구절을 통해 밝히신다. 그 말씀이 21절이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21절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각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고 밝힌다. 마가복음 9:29에 보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대부분 곡해하여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도나 금식이란 나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와 금식은 믿음에 의해 나올 수 있는 것이지 믿음이 없는데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기도하면 된다는 기도만능주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이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죄인들을 빼내시고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하시는 일은 변화 산 위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모세와 엘리야가 그토록 원하는 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실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신 이적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영생은 패역한 세대에 속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이루시는 일이다.
산 아래 패역한 세대의 사람들은 자기 경험으로 권능을 행하려고 한다. 전에도 한 적이 있고 경험했기 때문에 그 경험의 바탕에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졌던 경험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그 믿음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지만 사실은 나의 의를 더 공고히 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자기 의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것에 있다.
믿음은 우리가 가질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히 12: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엡 2:8).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선물을 받았을 때 비로소 악한 영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별세를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를 원하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2022042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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