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고린도전서

02.고린도전서 1:10-17 분쟁의 소식

불편한 진리 2015. 1. 2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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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0-17 

분쟁의 소식

 

적절한 인사를 한 후에 바울 사도는 10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로 풍족한 은사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한 바울 사도가 곧장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이유는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11).

고린도 교회 내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분파가 생긴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12).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분파가 형성되었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각각 나는에게 속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분파를 조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분쟁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바울 사도는 분쟁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바로 편지를 써서 권면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바울 사도의 생각에 있어서 분쟁의 문제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은 바울이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라고 하는 물음에서 그 심각성을 잘 알 수 있다. 즉 교회의 분쟁은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나뉘는 것으로 보는 심각한 죄악이라는 것이다.

바울파가 형성된 것은 아마도 그가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점에서 바울을 훌륭한 지도자로 생각하였을 것이고, 아볼로파는 아볼로가 많은 학식이 있는 자였을 뿐만 아니라 언변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18:24-28). 게바파는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유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특정 음식 삼가 규칙 등을 강조한 베드로의 가르침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파는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인간의 가르침에 얽매일 필요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직접 교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바울이나 게바나 아볼로가 분파를 만들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도자들을 훌륭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 이름을 중심으로 파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나는 사람 지도자에게 속하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선언하게 되니 이 또한 여러 분파 중의 하나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선언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여러 분파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사람 지도자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짐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여기서 바울 사도의 권면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형제라는 전제를 가지고 권면하고 있다(1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형제이다.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근거로 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 분파가 발생한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근거를 망각한 결과이다. 교회에 나오지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나오기 때문에 자기 중심의 분파, 나는 누가 좋아 누구에게 속했다는 자기 취향에 맞는 분파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초등부,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장년부 등 복음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나이별로 그룹을 만들어 성경공부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취향에 맞는 친목 그룹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죄 용서의 은혜를 깨달아 주님의 몸으로서 하나됨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죄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 그렇다면 교회에 나올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파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거부하는 행위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처사이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한 몸으로 연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면서 서로 서로가 한 몸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어디서 확인해야 하는가 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에서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13)라고 교회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세례를 준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반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사단의 종으로 살던 것을 예수를 주로 고백하므로 자신을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게 됨으로 오직 주님께 매인 자로 살게 되는 것이지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나 혹은 오늘날 목사에게 매인 자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세례를 주는 목사 역시 자신이 세례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베풀었는가 하는 것에 매인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매인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사들이, 특히 군목이나 교목, 교도소에서 세례를 준 목사들은 은근히 자신이 세례를 베푼 사람 수를 내세우면서 자랑하는 목사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실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준 사람에 따라서 죄 용서가 달라지거나 구원의 등급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신앙고백으로 삼아 주의 영에 늘 붙잡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14)라고 했고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16)고 했다. 그 이유를 소극적인 면에서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5)고 했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고 밝히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영적인 지도자로 여기고 바울에게 속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오해의 소지를 벌써부터 차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파당을 형성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에 인간은 항상 자신의 복음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보기보다 복음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바울, 베드로, 아볼로를 쳐다보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도 목사는 복음을 드러내는 자이지 세례주는 자가 아니다. 목사란 복음을 드러내는 한낱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 고린도에 보내신 것은 세례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이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주는 일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바울 사도의 이러한 태도는 종교 의식, 종교 행사가 목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는 것이 자신이 보냄 받은 목적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17). 이것은 복음은 말하는 재주로써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의 지혜,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거나, 교인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재능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는 인간의 말재주로 그쳐버린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설교 잘하는 목회자를 원하지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를 원하지 않는다. 설교 잘하는 목회자를 원하기 때문에 유명한 설교자를 따라 우왕좌왕하며 그들에 속해 그들을 따라다니는 모습은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복음을 바르게 증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수 있다면 참된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2000.12.3 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