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레위기

08.레위기 13:1-14:57 문둥병에 대하여

불편한 진리 2015. 1. 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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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3:1-14:57

문둥병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13-14장을 통해서 문둥병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죄에 대하여,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질병이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이 땅에 있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 문둥병(구약 시대에는 병명을 구체화한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문둥병이란 일반적으로 있는 피부병이나 혹은 의복이나 집에 생기는 곰팡이 균에 대한 것을 포함한 것으로 통칭 문둥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이란 피부로 확연히 드러나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죄인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2절에 보면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가되 제사장은 피부의 상태를 7일 단위로 확인하고 문둥병이면 문둥병으로 진단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제사장에 의해 문둥병으로 진단이 나면 문둥병자는 이스라엘 진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했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13:45,46)고 했다.

이는 문둥병자가 이스라엘 진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버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수혜자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성막) 곳에서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5:3).

실로 인간의 비참한 상태는 하나님의 거룩성에서 배제된 상태에 있는 것이지 물질의 부족함이 아니며, 제사지내줄 아들이 없다는 것도 아니며, 의지할 아내나 남편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곧 죽음이요 지옥이다.

이 때 제사장은 문둥병이 낳도록 안수를 한다든지 제사장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따라 진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둥병의 규례에 대하여 제사장이 하는 일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이 소경이 소경된 것은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질병이 자기에게 오는 이유는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답변은 제자들의 사고방식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속에는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답변은 자기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고 말씀하셨다.

그 일이란 4절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일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일을 하게 하시는 그 일을 나타내시는 것 때문에 소경을 소경으로 지금 예수님 앞에 두셨다는 것이다. 결국 그 소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일에 도구가 되기 위하여 소경의 비참한 상태로 있어야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소경이나 그 부모가 전혀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경의 비참한 상태가 바로 죄인의 모습이고 그러한 인간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문둥병자가 있으면 자기 죄 때문에 그렇다고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저렇게 비참한 상태가 바로 내가 죄인 된 모습이요 하나님 앞에 비참한 상태이구나라고 깨달아야 했다. 이스라엘 전체가 문둥병자요 모든 인간이 다 문둥병자이다.

문둥병자에 의해 접촉되어진 것은 모든 것이 다 부정한 것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격리되어 하나님의 거하시는 진에서 쫓겨나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오늘날 모든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이 아니라 진 밖에서 통회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14장은 문둥병이 나으면 제사장을 불러 정결케 하는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규례를 말씀하고 있다.

문둥병은 제사장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기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어떻게 문둥병이 나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주목할 사안이 아니다. 결국 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처리하셔야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을 다시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문둥병자가 이스라엘 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의 진단과 함께 일정한 의식을 치러야만 되는 것이다. 의식을 행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통해 누군가의 희생을 믿는 것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인데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희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문둥병자는 오직 피흘림 안에서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옴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과 산에서 내려 오셔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으로 연결해서 마태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실 때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8:3). 즉 죄에서 사함을 받는 것은 산상수훈을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율법으로 알고 그것을 잘 지키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뜻이 있어야 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제사장에게 보내서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했다. 곧 그 문둥병자들은 이적에 의해 자신들의 문둥병이 고쳐졌다는 사실을 볼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림으로 누군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결코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율법이 될 수 없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산상수훈의 완성 안에 사는 것이 된다. 비록 아직 내가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아직 죄짓고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으로 용납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도 죄를 짓는 죄인의 모습일지라도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8:1,2). 그렇다면 성도란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놈(?)이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고백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권리, 자기 주장하지 말고 주어진 것이 은혜인줄 알고 감사하는 자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성도에게는 자기 권리가 없고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를 드러내도록 증인 역할을 하는 사명만 있을 뿐이다.

14:33 이하에서는 집에 생긴 문둥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집에 무슨 색점이 발생했으면 제사장에게 말하여 진단하게 한다. 이 때 제사장은 일단 그 집의 물건을 다 빼내고 비우게 한 후에 살펴보아야 한다. 부정을 면케 하기 위해서이다.

제사장이 그 집의 색점을 보았을 때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7일 동안 집을 폐쇄한다. 그리고 7일 만에 다시 와서 보았을 때에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색점이 있는 돌을 빼내고, 집안 사면을 긁어내고 긁어낸 흙과 함께 성밖 부정한 곳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돌과 다른 흙으로 채운다.

그렇게 한 연후에도 역시 그 집에 문둥병이 생기면 집을 헐어서 모든 재료들을 성밖에 부정한 곳에 버린다. 그러나 재발하지 않으면 새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백향목과 홍색실, 우슬초를 취해 새의 피와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려 정결케 하며, 또 한 마리의 새는 산 채로 성밖 들에 놓아 그 집을 속하는 의식을 치루어야 정결케 된다.

집에 곰팡이가 피었을 때에 이렇게 복잡한 의식을 치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른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

이 말씀은 어쩌면 지금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여 집을 짓고 살 때를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는 것이 결코 그들에게 참된 행복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그들의 본래적 삶을 잃어버릴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틀림없이 자신들이 애굽에서 어떤 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잊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짓고 사는 안정되고 평안한 생활이란 여호와를 잊어버리도록 하기에 적합한 생활이다. 성과 집이 주는 안락함에 젖어든다는 것은 더 이상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의 안전과 안락함, 평안함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신앙생활이란 하나의 종교생활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죄악 된 인간의 본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셨다. 하나님은 죄의 본성을 아시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된 때에즉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히 자기 언약대로 기업으로 주시리라고 하신 땅에 자기 백성들을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대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의 집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요 심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이라고 하셨다. 집의 문둥병은 우연히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기게 하신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시듯이 동일하게 문둥병자와 집의 문둥병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문둥병들을 통해 죄의 권세에 매여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복이나 집에 문둥병이 생기는 것을 통해 인간이 의지해야 할 것은 의복이나 집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부의 적들로부터의 공격에서 보호를 받는 것은 튼튼한 집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나그네였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때부터 떠돌이였다. 가인이 에녹성을 쌓았던 것은 자기 보호 본능이었다(4:17). 하나님의 보호하신다는 차원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성을 쌓음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 역시 나그네로 살았다(7:5). 그 후손인 이스라엘 역시 나그네였다. 애굽에서도 나그네였고, 광야에서도 나그네였으며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도 나그네임을 잊지 말고 아직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참으로 거해야 하는 곳은 가나안 땅에 지어진 집이 아니라 문둥병을 발생시키는 당사자이신 하나님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127:1-2). 참된 쉼이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처로 삼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집을 자신의 안전으로 알았고, 세상적인 것들을 보호막으로 알고 살았었다.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세상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예수님(8:20)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적으로 힘없는 예수였기에 로마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들을 안전하게 하는 일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이 이미 자기 백성들을 위한 장막이었고(1:14), 십자가를 지시는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의 처소가 되게 하셨다(14:1-3). 곧 예수님 자신이 거처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도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1-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썩어질 의식주(衣食住)를 바라보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영원한 안식처가 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