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강
부활, 생명
요한복음 11:1-4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손 안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사고방식이 전환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고방식으로 사느냐 하는 것으로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 사고방식이란, 세상 정신의 사고방식이냐 아니면 십자가 정신의 사고방식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적 사고방식, 십자가 정신의 사고방식이 언약적 사고방식이요,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사고방식으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을 많이 봅니다. 분명히 성도라고 한다면 십자가 정신,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산다고 하면서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한 주간동안은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주일 하루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 나라의 사고방식대로 살려고 하니 많은 모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끼리의 관계가 왜 사랑의 관계로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까? 일주일 내내 말씀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다가 주일 하루 와서 교회니까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살려고 하니 그것은 억지요,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말씀대로 살려고 해서 억지로 사는 모습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여 나오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동생이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 급히 달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거하십니다.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즉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했을 때에 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 사건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으니까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4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 본문에서 단순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을 통해 나타내시는 취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25-26절).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일찍 오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21,32,37절).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고(思考)의 끝은 죽음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죽으면 참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운 사람이라고 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아직도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을 제대로 키워놓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것마저도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아직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아까워하면서 죽기 전에 손을 썼으면 회복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지는 사고방식은 죽음을 끝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은 자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분이다.’ 혹은 ‘예수님이 생명을 전달하시는 분이니까 믿어라! 그러면 믿는 자에게 부활, 생명을 주실 것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말하면, 이제 예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졌으니까 남은 것은 우리의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하면 우리가 부활될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에서나 혹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 재생이 아니라고 해서 단순히 미래에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아직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 또는 생명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신자가 나중에 죽게 될 때에 예수님이 다시 부활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그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즉 나사로가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어라!” 즉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예수님 안에 새로운 세계가 보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도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부활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께서 나를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반드시 드러날 것인데, 그 십자가 사건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이시는 계시의 절정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의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결코 부활, 생명을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화요리집 같은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 혹은 생명을 배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는 것으로 지금 부활, 생명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 안이란 다른 세상, 즉 죽음이 없는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는 생명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부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생명의 사고방식으로 전환되어진 자입니다. 부활, 생명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의 눈으로, 생명의 사고방식으로 바뀐 존재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가 성도입니다. 세상을 거꾸로 보고 거꾸로 생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세계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삶을 지금 누리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 생명이심을 믿는 자의 삶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자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입니다<1997년 5월 22일/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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