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24.요한복음 9:1-41 빛과 소경

불편한 진리 2015. 1. 23. 21:09

24

빛과 소경

요한복음 9:1-41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지적받는 것이 죄인의 상태는 빛이 전혀 없는 상태다!”, “우리는 어두움이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결코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가치를 둘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죄인인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8:7)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런 죄인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용서해 주신 존재가 되었다면 그저 감사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에게 나오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까?”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런 질문도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너무 쉽게 받는 것 아닙니까?”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됩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을 쉽게 받으면 어떻고 어렵게 받으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이라는 존재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행위가 가미되어야만 구원을 받는 것같은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죄인의 모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은근히 반항이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도 뭔가 다른 사람하고는 달라야 합니다. 차별이 있어야 분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냥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요한복음 6:29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가 무엇입니까?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길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 물음은 소경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고칠 수 없고 또 날 때부터 주어진 병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에게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자기들을 저 소경과 다른 존재로 여긴데서 나온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제자들이 질문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 그렇다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참된 빛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소경이고 누가 눈을 뜨고 있는 자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이 소경을 동원시키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이 빛이라고 하는 사실을 계시하는 일에 소경을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이어야 하고 고침을 받더라도 전혀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즉 실로암에 보내는 구실로 진흙을 눈에 바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소경과 당시 유대인들과 비교를 시킵니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소경과 증거를 가지지 않은 눈을 뜬 자와 대조함으로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에게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합니다(2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해놓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다 영광이 됩니까? 올림픽에 나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죄인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것이 영광이 되는지 조차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지금 거꾸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라고 말하면서 죄 있는 쪽이 죄 사함 받은 쪽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밝힙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준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경 쪽이 지금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확실한 증거란 어디서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서 온 것입니다(33). 예수님은 확실한 증거를 주시기 위하여 그 소경되었던 자를 다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준 빛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경이었던 자는 이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38). 그러므로 보내심을 받은 자는 이제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어떤 자가 진짜 보는 자이고, 어떤 자가 진짜 보지 못하는 자인지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오해를 가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울 사도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를 하나님께서 쓰실만 하니까 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뭔가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실 때에 그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뜻을 품고 충실히 준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 그런 미천한 자들을 하나님은 선택하셔서 자신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도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일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의 은혜 안으로 부르신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드라마의 소품입니다. 소모품입니다. 연극에서 소품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극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꾸며진 것으로 그 당시 필요한대로 소모되는 들러리들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얼마나 훌륭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구로 쓰셨는가 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실패의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세상의 것에 대하여서는 소경이 되었고, 하늘의 것들에 대하여, 생명의 것에 대하여서 만큼은 확실히 보게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믿는 증거를 가진 셈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가진 자의 삶은 소경이 당당히 밝혔던 것처럼 기존의 유대교에서 쫓겨나도 괜찮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직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괜찮다는 식으로 사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죽는 것이라도 기쁨이 된다는 식의 삶입니다. 종교 조직 자체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유대교라는 종교 조직체는 빛이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마치 대낮에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눈을 감고 태양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은 하고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를 위해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죄인이요 또한 죄인들이 만든 조직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만든 조직체가 커져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일생을 투자할 각오가 된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거창하게 어떤 조직이라도 이루어서 하나님의 큰 일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루신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보내신 자를 위해서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이 주님의 요구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14:7-8)<199612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