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강 /
누가복음 21:1-19
종말의 현상(1)
누가복음 20:45-47에 보면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곧 심판주이심을 다윗의 자손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통해 드러내셨다(20:41-44). 이러한 심판주의 권세와 권위로 예수님에 대해 도전하는 세력들의 대표적인 자들인 서기관에 대한 판결이 중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심판이 중한 이유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그들의 삶이 문제였다. 언약의 하나님은 곧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약자의 하나님이란 무조건 약자의 편에 하나님이 서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약자로 십자가에서 희생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들과 과부가 헌금을 헌금궤에 넣는 것을 보시고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게 된다. 이를 보고 우리는 단순히 과부의 헌금을 돈의 액수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칭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헌금하는 것도 액수와는 상관없이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상대적으로 많이 넣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칭찬하셨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물량적으로 많은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과부의 헌금도 두렙돈이었다. 두렙돈이란 아주 적은 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헌금도 괜찮았는데 과부의 헌금이 더 좋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교적인 말씀이 아니라 부자들의 헌금을 거부하고 과부의 헌금을 받으신다는 의미다. 과부의 헌금은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이다(4절). 과부의 헌금이 생활비 전부라는 의미는 과부가 하나님께 정성스럽게 헌금을 드렸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주님의 권세와 권위에 있다. 이것이 바로 심판주의 권세로 주님께서 판단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주님은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과 그 권세로 판단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어디에 가치관을 두고 사느냐 하는 것으로 인해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드러난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인간의 가치관과는 다르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셨다.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외모나 성전의 아름다운 돌들을 바라보기보다는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가난한 자, 약자들을 통해 약자로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시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심판주의 권세와 권위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운 돌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6절)고 선언하셨다.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는 성전도 파괴되고 그 의미가 상실된다는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을 통해 종말의 현상을 말씀하시게 된다.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8-9절). 이것이 바로 종말의 현상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속해서 종말의 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0-1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핍박과 고난을 받는 그것이 곧 종말의 현상이요 그것이 종말의 현상에 대한 증거라고 하셨다. 현실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로 종말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핍박을 받는 그것이 곧 종말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종말에 당연히 일어나야 할 현상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핍박과 고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상황까지도 벌어지는 것이 종말의 현상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16절).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17-18절). 이 말씀을 예수 믿는 자들이 종말에 병도 걸리지 않고 핍박을 받더라도 주님이 철저히 보호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실 것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지금 십자가를 향해서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에 의해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절)는 말씀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참으면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에게 주어진 인내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이라면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해 내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4-15절)는 말씀도 우리가 전혀 준비하지 않아도 목사가 설교 잘 하게 해 주신다거나 혹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유창하게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일에 있어서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시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어떤 자리에서든지 주님은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잘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나 누구에게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님은 이 본문을 통해 종말의 현상은 성도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주님의 복음을 드러내면서도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심판주의 권세와 권위로 말씀하셨다. 이 권세의 말씀에 굴복되어진 자가 종말을 사는 성도의 모습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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