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강 /
누가복음 20:20-26
세금에 관한 논쟁
누가복음 20:19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고 선언하고 있다. 포도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로 인하여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여 죽일 빌미를 찾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더욱 자극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은 죄와 충돌되게 되어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다. 그 복음이 자기 종교를 지키고 자기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죄인들을 거리끼게 하는 것이다. 아니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복음은 죄인들을 공격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성전의 지도자들을 거리끼게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예수님과 성전의 지도자들과 갈라놓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좋은 것이 좋다고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도록 만들면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고 거리끼는 마음이 들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좋게 하고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바른 방법일 수는 없다.
물론 복음 전하는 자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상대가 복음을 싫어하는가 아니면 복음 전하는 사람을 싫어하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갈라놓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 관계가 잘못되어서 갈라지는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겸손함으로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복음이 가리워지지 않는가를 늘 염려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런 연약함까지 주님은 사용하셔서 복음을 드러내시고 말씀과 말씀 아닌 것을 갈라내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순종하는 자가 성도이리라.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대적자들은 정탐꾼들을 보내는 것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보낸 정탐꾼들을 통해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은 이 질문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함정에 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처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1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전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문제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안 성전 지도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정치적인 권세에 붙이고자 수를 쓴다. 그 방법은 정탐들을 보내어 스스로 의인인 체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인즉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22절). 이 질문을 하기 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옳게 말씀하고 가르치는 자”, “차별을 하지 않으며 진실되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자”라고 아양을 떨었다(21절).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아서 이렇게 말하였다기보다 자신들의 질문에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울타리였다. 즉 예수님이 이렇게 진실되게 가르치니 우리가 하는 질문에도 결코 헛되게 거짓으로 답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22:15-16 말씀을 보면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어떤 일로도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집단이다. 바리새인이란 철저히 율법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며 로마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젠가 메시야가 나타나면 로마 정부를 뒤엎고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헤롯당은 로마의 정부에 의해 살아가는 정치적인 집단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요구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관점에서도 어긋나지 않고 정치적인 집단인 헤롯당의 요구에게 어긋나지 않는 답 변이었다. 즉 예수님이 유대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왕으로 인정하고 로마에 세금을 거부하라고 해야 할 것이고, 또 헤롯당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로마 정부에 철저히 세금을 바치라고 답변해야 되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계략을 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24-25절).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는 돈에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으신다. 당시 로마 돈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에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종종 강단에서 국가에 세금을 바쳐야 할 것은 탈세하지 말고 철저하게 잘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교회의 기업가는 그리스도인이 탈세하지 않고 철저하게 세금을 내면서 기업을 운영함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회사를 설립하였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는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탈세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본문은 정부에 세금을 정확하게 바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세금을 잘 바치고 탈세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는 자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의 권력은 반드시 짐승, 궁극적으로 사단과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세상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잘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강조점은 뒤에 있다. 즉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상의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원래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다. 데나리온에는 당시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너희가 로마의 황제에게 속하였고 그가 베푸는 것으로 먹고살고 있다면 로마의 황제 형상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의 정부에 속하였고 로마 황제의 형상에 속한 것이라면 로마의 정부에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것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가이사에게 일부 바칠 것은 바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바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본문 말씀이 있는 마태복음 22장의 문맥을 보면 37-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하고 뜻을 다하여야 한다. 남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고 일부를 드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자들이 성도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6:24에 의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도 로마 정부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나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바치느냐 하나님께 바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 때문에 나온 질문이기에(18절) 그런 일에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이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쓰는가? 예수님이 물으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성전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세상의 권력과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을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20절) 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즉 하늘로부터 온 권세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 온 권세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온 권세에는 의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의인인 척 하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의인인 척 하는 모습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온 권세 그 자체였고, 또한 하늘로부터 온 권세의 지배를 받고 계셨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것으로 자신을 하나님께만 드리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이유는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의 권세에 대하여 도전한 도전의 상징인 동시에 하나님 편에서 하늘의 권세로 구원하시겠다는 구원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이 하늘의 권세에 장악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의인인 체 하는 존재였는데 하늘의 의에 굴복되어 십자가의 의를 덧입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산다는 것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지는 만큼, 살아지는 동안 주님만을 위해 사느냐 하는 문제이다. 자신이 주님의 소유인 줄을 아는 자를 두고 성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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