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강(2013.3.3)
사무엘하 10:1-19
암몬, 아람과의 전쟁
본장은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을 치루는 장면, 더 나아가서 아람과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에게서 다윗이 언제 어떻게 은혜를 입었는지 성경에 분명한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닐 때 도움을 얻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나하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조문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하눈은 다윗 왕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염탐하기 위한 것이라고 간주하고 조문사절단이 도착하자 그들을 잡아 수염을 절반을 깎고 엉덩이 부분의 옷을 잘라 돌려보냈다. 이러한 하눈의 행위는 이스라엘을 우습게 여기고 다윗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암몬과의 전쟁이 발생한다.
그런데 사실 암몬과의 전쟁은 이미 8:12에서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9장과 대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두 사건의 내용에서 공통점은 다윗이 은총을 베풀되 각기 그들의 아버지로 인하여 친절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9:1에 보면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하였고 본장에서도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2절)라고 다윗이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이 베푼 은총에 대하여 각기 다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베푼 은총에 감사하며 자신을 죽은 개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반면 암몬 왕 하눈은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며 오히려 다윗과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었다. 하눈이 이렇게 하면서 아람의 도움을 받아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암몬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우습게 여기고 다윗을 모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암몬의 배후에는 아람이라는 나라가 있었기에 암몬은 그것을 믿고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신명기 2:19에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이 암몬 족속의 땅을 빼앗을 수 없었고 암몬 족속 역시 롯을 통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할 수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자기들의 땅에 거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어떠했는가?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장애자였고 아버지의 토지나 재물도 다 빼앗기고 남의 집에 얹혀사는 존재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힘이나 또 힘이 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의 은총을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하게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하눈과 므비보셋에게 베풀어진 다윗의 은총은 그 당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부친 덕분에 주어진 은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받아들이는 시각은 천지 차이였다. 하눈은 힘을 축적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지만 므비보셋은 죽은 개 같은 자신을 보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 은총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지 나의 공로나 잘남이 아니다. 자신의 잘남이나 공로 때문에 주어지는 은총으로 보는 자는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주어지는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은 개와 같은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마음대로 받을 수 있고 또 거부하려면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가? 정답을 먼저 말하자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거나 또는 거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졌을 때에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고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죄가 어떤가를 보여 주는 차원이다.
성경에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대표일 뿐이지 여기에 모든 인간들이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며 거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약 성경이다. 신약 성경은 이를 뒷받침해서 증거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에서 한 가지 큰 근심을 토로한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 복음 안에서 살아가면서 복음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이 다름 아닌 자기 동족이라는 사실에 부딪쳤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내 형제, 내 동족 골육의 친척이 구원받기를 원하면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예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복을 죄의 본성대로 행동하여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혈통을 타고 태어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죄인이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된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은 단순히 유대인들만 아니라 죄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한 이러한 은총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다윗을 통해 은총을 베풀게 하시고 므비보셋을 굴복시키시는 반면 암몬은 죄의 본성 그대로 행하도록 두신 것이다. 자신이 가진 힘을 믿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이 은총, 은혜가 베풀어질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비록 암몬이 아람과 힘을 모아서 나타난 죄의 현상일지라도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 역시 다윗 안에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싶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 장은 암몬, 아람과의 전쟁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암몬과의 전쟁에서 요압과 아비새만 출정하였는가? 그리고 아람과의 전쟁에서는 왜 다윗이 직접 나서야 했는가? 전쟁이 암몬과의 전쟁은 작은 전쟁이었고 아람과의 전쟁은 본격적으로 큰 전쟁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나서야 했는가?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통해 보건대 아람과의 전쟁에서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 아직 다윗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윗의 생각에는 아직 자신에게 힘이 있고 그 힘을 얼마든지 하나님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대조해서 보여 주는 것이 요압이 아비새를 향해 하는 말 속에 드러나 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2절). 요압과 아비새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나갔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만큼은 다윗이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느냐 라고 쉽게 결론내리고 말아야 할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한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들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의 왜 집을 지을 수 없는가를 보여 주시는 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시고 있다.
다윗은 언젠가 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면서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6-7)
우리가 다시 한 번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전쟁은 힘과 힘의 대결 구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의의 대결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에 이기는 것은 적들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고, 반대로 전쟁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힘을 죄악으로 보신다. 누구에게나 힘이 주어지면 인간들은 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계속하여 힘을 요구한다. 심지어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도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힘도 기도에 실려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힘이 없는 존재로 고백하며 오직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져 그분의 능력만 드러나게 된 존재로 사는 자이다.
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된 것도 기적이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는 것이고, 반대로 복음을 거부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사 6:9). 이러한 언약적 내용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암몬과 아람 또는 이스라엘 중에 누가 승리하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이겨서 어떤 자에게 은총이 드러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자로 살게 될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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