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04.사무엘하 4:1-12 레갑과 바아나

불편한 진리 2014. 11. 8. 18:03

4(2013.1.6)

사무엘하 4:1-12

레갑과 바아나

 

아브넬이 다윗의 편이 되겠다고 한 것이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다윗은 아브넬을 받아 주었으나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함으로 다윗과 이스보셋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1절의 말씀을 보면 기울어져 가는 사울 왕조를 잇고 있던 이스보셋은 당시의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기 신하였던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고 하는 소식은 희소식이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아브넬은 이미 다윗 편으로 돌아선 상태였고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를 만나 다윗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도 이 소식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만일 이스보셋이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면 백성들을 선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에 대하여 애가를 지어 불렀던 것도 이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을 예측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요압에 의해 살해될 당시 이스보셋에게는 바아나레갑이라는 군지휘관 둘이 있었다. 그들은 한 형제로서 사울 왕의 신하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민족적인 소신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출세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눈치에 능한 자들이었다.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사울 왕조의 이스보셋 왕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권력으로 부각되는 다윗 왕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였다.

그들은 마치 다른 일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이스보셋이 거하는 왕의 궁으로 들어가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 틈을 타 살해하고 그 머리를 베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달려갔다(5-7). 그리고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8)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스보셋 왕을 죽임으로써 다윗의 적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고 포상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에게 포상하기는커녕 그 형제들을 엄하게 벌했다. 그들은 다윗을 위해 충성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선포하였다. 다윗은 9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0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11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서 헤브론 못가에 달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보도록 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다.

레갑과 바아나가 생각한 것은 이스보셋이 다윗의 원수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윗의 원수를 제거하면 다윗에게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레갑과 바아나의 착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통용되고 세상에서 대접받는 사고방식이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줄이 사는 줄이고 어느 줄이 죽는 줄인지를 잘 선택해서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제 사울의 줄을 버리고 다윗의 줄을 선택해서 서고자 하였는데 그들이 더 확실하고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스보셋의 머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이고 죄의 권세에 매인 방식이다.

예전에 다윗의 부하들에게서도 이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모습이 나타났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두 번에 걸쳐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다. 그때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요청한 것이 원수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조언하였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윗의 원수로 여기셔서 오늘 사울을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신다고 조언하면서 문제는 원수이기에 원수를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다윗이 평안할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에도 그의 부하들은 동일한 조언을 하였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삼상 26:8).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사람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원인을 원수가 존재하는 것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원수를 제거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울이 그렇게 생각했고 다윗의 부하들이 그러했으며 이스보셋의 군장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 아말렉 사람이 그랬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이유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사람들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언약의 왕으로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 때문에 다윗의 연약함과 실수들을 여과없이 보여 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언약의 측면들을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언약의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고 보여 주는 나라로서 복수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나라와는 달리 공의의 나라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긍휼과 은혜로 다스려지는 나라임을 천명한다. 즉 이스라엘 나라는 언약의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로서 그 언약에 의한 공의가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 덕분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은혜를 철저히 입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사람이 원수가 될 수 없었다.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러하듯이 언약의 왕으로 세움을 입은 자는 사람을 상대로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찾는 원수들에 대한 심판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윗에게 잘 보여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다윗의 원수를 살해한 레갑과 바아나를 가차없이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결국 성경은 사울과 다윗을 경쟁 구도로 보고 성공하는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을 통해 대표되는 죄의 사고방식과 다윗을 통해 대표되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고방식이라는 두 사고방식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사울을 통해 드러난 것은 죄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고 다윗을 통해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왕을 이스라엘 중에 세우신 것에는 세상의 죄악와 대비한 하나님의 언약적 뜻을 드러내고 싶으신 것 때문이다.

10절에서 다윗이 이스보셋을 의인이요 레갑과 바아나를 악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스보셋의 행위가 의롭기 때문에 그를 의인이라고 하고 레갑과 바아나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나타내실 악과 의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드러내실 뜻이 하나님의 기준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신 것뿐이다. 즉 세상의 방식으로 다윗의 힘에 편승하려고 하는 그들이 악인이고 악인에 의해 애매하게 희생된 자를 의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복을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이미 주신 복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있고 그 복을 왜 주셨는가를 알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복을 받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복을 이미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할 일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배우는 것이다. 그 일하심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