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10.사무엘상 9:1-27 왕으로 선택된 사울

불편한 진리 2014. 6. 26. 19:38


사무엘상 9:1-27

왕으로 선택된 사울

 

본장의 시작은 사울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1-2절).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 기스의 아들로 준수한 자였고 어떤 자보다도 키가 컸다고 강조한다. 즉 요즘 말로 하면 얼짱 몸짱이었다는 말이다. 외적인 조건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니었다. 3절 이하에 보면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리고 사울에게 찾아오라고 하였을 때 암나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5절에 보면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라고 한 것을 보면 부모에 대한 생각도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7절에서 “사울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주머니에 먹을 것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라고 하였다. 그는 사무엘을 찾아 대할 때에도 빈손으로 가지 않고 예물을 준비하는 마음을 가진 자였다. 자기 집안의 재산인 사소한 나귀를 찾는 일에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는 제쳐두고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거기다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21절). 사울은 그의 집안이나 외모나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선지자를 대하는 태도, 겸손한 성품 이 모든 것들이 거의 완벽하게 모범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자고 사무엘에게 요구하는 인물은 바로 사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요구를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합당한 존재를 왕으로 세우고자 선택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사울이 아버지의 나귀를 찾기 위하여 왜 여러 곳으로 다녀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그냥 왕으로 세우시면 되는데 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땅 여러 곳을 다니도록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사울이 나귀를 찾는데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 사알림 땅과 베냐민 사람의 땅, 숩 땅을 하나님께서 두루 다니게 한 것은 일종의 전시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만한 존재가 있는가를 보이시기 위함이다. 외형상으로 왕으로서 사울만한 존재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나귀를 찾아 여러 곳을 다니게 하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무엘과 만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울을 그렇게 인도하셨던 것이다.

16-17절을 보면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계획하시고 선택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일 때문에 어쩌면 사무엘의 아들들조차도 부패한 자로 내버려 두셨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왕을 세우고자 하였을 때에 사무엘의 아들들을 가장 유력한 존재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아들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상태로 만드셨던 것이다.

사울은 아버지의 나귀를 찾으러 나갔다가 길에서 캐스팅 되어 왕위에 오른 자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행운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신앙으로 사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인생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은 내 생각과 내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맡겨진 존재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인간관계를 원했다. 영웅 같은 왕을 원하고 그 왕이 자기들을 잘 이끌어 주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고 희망이었다. 자신들을 출애굽시키고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영웅을 믿고 따르기로 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영웅과 같은 왕을 원하는 이스라엘의 마음은 확실히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여호와를 버린 처사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믿을만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얼짱이요 몸짱이며 효성이 지극하고 거기다가 겸손하기까지 하며 예의바르며 신앙적으로 보기에 흠이 없어 보이는 그런 사울을 등장시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왕으로 세우시되 하나님께서는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하시며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16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은 백성들의 부르짖음 때문이며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되 그들의 요구에 무조건 들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어떤 지도자를 세우든 하나님의 목적은 언약 백성들에게 자기 언약을 드러내고 가르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사울이 사무엘을 찾은 때는 제사를 지내는 특별한 날이었다. 사무엘은 사울이 찾은 이유를 이미 알고 사흘 전에 잃은 나귀들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에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사울을 사무엘과 만나게 하셔서 왕으로 세우는 일이었다는 것이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사무엘은 산당에서 사울과 식사하면서 그를 특별하게 예우했다. 그는 30여명의 무리들 중에서 사울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제물의 음식을 나누면서 사울에게 특별한 부위를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24절).

이 특별한 제물 음식의 나눔은 하나님께 드린 제사와 직접 연관이 있다. 즉 산당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지금 함께 먹게 된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제물을 사무엘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특별한 직무를 가진 지도자가 될 그가 이제 선지자의 무리와 함께 그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해 특별히 주문해 둔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겨룰 때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치신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이 야곱의 사건(창 32:24-32)으로 인해 환도뼈와 연관된 부위는 먹지 않는다. 그러나 화목제 음식을 나눌 때에는 상황이 다르다. 그것은 생명과 연관된 언약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레위기에서 화목제 음식을 나눌 때 넓적다리 곧 동물의 뒷다리를 특별히 취급한 것에서 드러난다.

 

32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33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34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레 7:32-34)

 

사무엘은 그 일 이후 사울을 자기와 대등한 자리에 두게 된다. 사울이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는 지도자로서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이 과연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왕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위에 왕으로 세워져 언약 백성들을 다스릴 지도자가 된다는 사실 자체는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언약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이끌고 가시는 곳이 어디인가? 곧 하나님 나라이다. 이는 애굽에 살던 자들을 언약의 땅에 데려다 놓고 그 언약의 땅이 끝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보여 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안식이다. 그 안식이 바로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다. 성도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어떤 자는 낮은 자리로, 어떤 자는 높은 자리로, 또 어떤 자는 환난의 자리 평안의 자리로 인도하신다. 어떤 자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사실 자체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2012.4.8/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