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7:1-17
미스바 모임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벧세메스를 거쳐 기럇여아림에 안치되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요청을 받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져와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았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그로 하여금 언약궤를 지키게 하였다. 언약궤는 그때부터 20여 년 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고 말씀한다(2절).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다시 돌아온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어떤 일을 벌이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된 배경이 3절 이하의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5-6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금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그들이 말하는 범죄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를 생각하면 악한 행동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생각이 교회에서도 바뀌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결국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물론 종교적인 범죄도 강조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사소하고 부수적인 것을 가지고 말한다. 예컨대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 즉 주일을 범하는 것을 죄로 말하고, 십일조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모두 행하면 죄와 상관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세상에서 통용되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죄가 아니라 세상은 전혀 알 수 없는 죄이다. 세상은 죄를 규정할 때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 즉 행동의 결과로 나온 것을 가지고 판단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상태인가를 먼저 규정한다. 즉 결과로 나온 행동만 아니라 그 행동이 나오게 된 동기, 마음 상태까지를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죄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범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3절에서 사무엘이 이렇게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의 범죄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쉽게 우상을 섬긴 것이 문제였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볼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방신들을 섬기고 우상을 버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6장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들이 언약궤를 잘못 다루는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으로 일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성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드러났는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무수히 말씀하시며 보여 주신 것이고 출애굽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어린 양의 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가나안 땅에 확산시키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스라엘이 애굽과 동일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 유월절을 통해서 자신들의 불의함과 어린 양의 피의 은혜를 되새기는 것이 이스라엘의 삶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9절에서 사무엘이 어린 양을 취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과거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애굽을 탈출하였던 이스라엘이 피의 정신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블레셋에 보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이 다시 출애굽하는 심정으로 회개하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사무엘이 어린 양의 잡아 번제를 드려 그 정신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방신들을 거부하고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것은 오직 유월절 어린 양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또한 구원의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자신들을 살게 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된다.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는 범죄는 인간의 어떤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으로 불의한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멸시하는 것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18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18-21)
이 말씀이 성도가 죄에 대해서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21절에서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는 구절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 것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도 동일한 차원으로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런데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에 그냥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붓고 금식하였다. 중동 지역에서 물은 그들에게 생명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물을 붓고 금식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죽고 사는 문제가 물에도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무엘이 하는 기도 역시 바로 이런 차원의 기도이다. 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응답을 받는다는 것으로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내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이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인 것은 회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도 돌리는 형편에 있었지만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미스바 모임을 전쟁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차원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블레셋은 우상을 숭배하는 실상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것을 들었다. 들었다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다급해진 이스라엘은 사무엘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분명 이스라엘의 위기였다. 그러나 4장에서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른 양상이었다. 언약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던 모습(4장)과 자신들의 무기력한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으로만 승리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의 모습(7장)은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언약궤가 블레셋을 거쳐 오는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가 블레셋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블레셋이나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이스라엘도 취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사무엘의 역할이 필요하였다. 언약궤를 메고 나가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은 블레셋이 우상을 숭배하는 사고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됨으로 블레셋에 대한 승리를 경험한다.
13-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애초부터 가나안 땅의 족속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성읍을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은 마법과 같은 언약궤의 힘에 있거나 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이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준비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영원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계시하셨다. 사무엘이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켰다는 의미이다(2012.3.25/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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