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12.사무엘상 11:1-15 왕이 되는 사울

불편한 진리 2014. 7. 29. 21:41


사무엘상 11:1-15

왕이 되는 사울


사무엘상 9장에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로 드러난다.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택되었다. 먼저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삼상 10:1-8) 이어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여 단순히 형식이 아닌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셨다(삼상 10:9-16). 그리고 미스바에서 공적인 모임을 통해 객관적으로 사울이 선정되는 과정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셨다(삼상 10:17-26). 이렇게 공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 있었다(삼상 10:27). 

이제 남은 것은 사울이 실제적으로 백성들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즉 공적으로 사울이 왕으로서 인정은 받았으나 실제적인 능력을 가졌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긴장이 본장에서 확실하게 해소된다. 10:27에서 사울이 보인 잠잠함은 본장에서 보이는 것과 대조가 된다. 이렇게 사울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였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신 때에 사울로 하여금 모든 백성들에게서 인정을 받도록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이시이다. 


1-2절에 의하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라고 말씀한다. 당시 요단 동편의 암몬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암몬의 수도 ‘랍바암몬’은 요단 동쪽의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갓과 르우벤 지파가 거주하는 사이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스라엘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므낫세 반지파, 갓 지파, 르우벤 지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 변두리에 있는 므낫세 지파가 살고 있는 길르앗의 야베스를 공격해 들어왔다. 암몬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때에 이웃해 있는 헤스본 왕 시혼의 땅을 차지한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늘 안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길르앗이 자신의 땅임을 주장하여 전쟁을 벌였으나 입다라는 사사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삿 11장). 

이제 나하스라는 강하고 야심찬 지도자가 나타나서 다시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나하스의 야심은 이 지역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전체에 수치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작은 한 지역을 완전하게 점령함으로 전쟁의 의사가 이스라엘 속에 있는지를 알아보고 심리적으로 이스라엘을 위축되게 만들고자 한 전략이었다(2절). 야베스의 사람들이 암몬에게 조약을 맺자고 제의하였으나 암몬은 야베스 사람들의 눈을 빼어야 조약을 맺겠다는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여 이 문제가 결코 야베스 안에서 처리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게 하셨다. 야베스 사람들은 울면서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린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야베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어떤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지금껏 지키고 인도하셨다. 그런데 지금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이라는 힘 앞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못 쓰는 신으로 취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두렵기보다 지금 당장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는 암몬과 화친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야베스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을 진리로 여기는 자들이 많다. 결코 천국은 없기 때문에 이런 속담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행복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가정의 행복, 교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다. 그 믿음에 의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죽고 사는 문제와 상관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 14:8)이기 때문이다. 


야베스 성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이 소식을 울면서 알리자 사울에게 다시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였다. 그러자 사울은 이스라엘 전체의 단결을 요구하는 표로 각을 뜬 소의 조각들을 각 지파에 보내었다. 그리고 드디어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7절)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사무엘 앞에 과감히 내세웠다. 공식적으로 왕으로 드러내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령 하나님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그 역할의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오로지 성령으로만 표현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근거하여 택한 자에게 임하여 구원을 온전히 완성하시는 자리까지 이끄신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증거 하시기 위해 선택된 자에게 임하시지만 그 역할이 끝나면 떠나기도 하신다. 

이렇게 볼 때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부여받은 용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사울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붙들어 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울을 붙들어 세워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이 노했다는 것은 사울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한 분노이며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 하나님의 노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야베스 성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암몬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없다는 것으로 울었다.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야베스는 끝장났다는 것에 대한 절망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된 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울음이란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일에 대해 무엇인가 안 된다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가?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걸고 하나님께 문제 해결을 흥정하는 우리의 악함이고 죄다. 눈물 흘리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는 눈물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울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워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 주신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존재하심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구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강한 자를 원하는 이스라엘이기에 야베스를 구원할 용사가 없다는 것으로 울었다. 그래서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시켜 이스라엘을 모으시고 암몬과 싸우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확증하시고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이 일을 통해 인간 왕 사울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원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언약의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보이는 세상의 힘에 대해서만 두려워하고 결국 세상의 힘 앞에 굴복하며 타협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모든 진노를 쏟아 부으신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시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신 그것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실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당연히 우리의 죄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울은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일으켜 사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대로 드러나게 하셨다. 그래서 사울은 새로운 지도자로 자신의 권위를 완전히 세우게 된다. 백성들은 아직도 사무엘을 최고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무엘에게 물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12절)라고 하자 “사울이 이르되…”(13절)라고 사울이 전면에 나서서 사울을 반대하는 자들에게도 큰 자비를 베풀 것을 말한다. 이후 길갈로 가서 이스라엘이 새로운 나라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을 가진다(2012.4.29 / 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