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4.말라기 3:1-6 의로운 제물

불편한 진리 2014. 4. 9. 13:06

의로운 제물
말라기 3:1-6
 
 
기독교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강조점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핵심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가지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치 않고 강조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그런 상황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윤리로 기독교를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윤리가 무엇입니까?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할 도리, 인륜(人倫)’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무엇을 마땅히 행한다는 것이며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절대적인 기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사람은 좌측통행, 차는 우측통행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이 강론을 할 당시만 해도 좌측통행이었지만 이것도 현재는 바꾸어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우측통행이 맞다고 하여 요즘은 우측통행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사람이 우측통행을 하고 차는 좌측통행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기준이 영국에 가면 정반대의 기준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은 상대적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지켜야할 기준이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데 선을 행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상대적인 기준에 맞춘 것이라면 윤리도 상대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윤리적인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비윤리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이런 점에서 윤리란 선과 악의 정당한 기준이 없이 인간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해서 주장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전혀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윤리라는 것도 허구로 끝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윤리, 도덕이란 인간에게서 선을 찾으려고 노력한 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어떤 절대적인 것을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을 보아도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의 선이 절대적인 것을 지지해 주는 부분이 없는지를 찾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많은 교회들도 이런 성경 해석에 젖어 있기 때문에 교인들의 자존심만 높여주는 일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 속에서 윤리성을 찾고자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처해 있는 환경이 보다 성스럽고 선하고 의로운 쪽으로 성숙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대감 자체를 하나님이 성경에서 죄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롬 3:23). 한 마디로 말하자면 누구나 다 인간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증거가 인간은 살아있는 날 동안은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입니다(롬 6:23). 인간이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 안에서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존재가 기독교에다 윤리라는 말을 붙여서 기독교 윤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윤리를 사회에 실천하자는 운동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또 하나의 사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환경 보호 운동을 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경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인간이 사는 환경, 즉 이 사회를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자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주님에 의해 폐기처분 될 세상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느냐 아니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늘 이렇게 자기가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들이 이 땅에서의 삶의 환경을 일부러 나쁘게 만들고 막무가내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환경 보호를 합시다. 그러나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환경 보호를 함으로 주님 나라에는 환경 보호가 필요 없는 나라임을 되새깁시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신의 삶을 위해 돈을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고 그것이 우리의 전부가 되는 삶이 아니라 돈을 씀으로 하늘나라가 물질에 매여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읍시다. 다만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운동’만은 삼가 합시다. 운동해서 되는 것 같으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운동을 했더라도 못해냈을 것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의 죄가 심각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운동으로 가능한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열심히 운동하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 하라! 새마을 운동 조직을 만들고, 기독교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법인체를 만들고 경제정의 실천연합회도 조직해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라! 부족한 것이 있으면 성령을 보내서 그때그때마다 도와 줄테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란 주님의 십자가 피 값으로 세워진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주님을 보여 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운동을 해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이제까지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하지 않았고 노력이 부족해서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까지 보내셔서 믿음을 주시고 또한 계속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구원받는 믿음이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그의 백성이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제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제사 제도가 시원찮아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이 문제가 있고 불완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실패를 계시로 삼아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뿐입니다. 그들이 실패했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기는 그것이 바로 주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을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 제사 제도를 주고서는 잘하나 못 하나를 보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을 준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그들의 제사하는 종교적 기능을 시험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제사를 드리므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자기를 위한 것으로 바꾸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가지고 있고 성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모세 언약의 본래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으로 증명된 셈입니다. 결국 그것은 율법을 주신 언약의 하나님을 모독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죄인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2장에서 제사장직의 영속성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축복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공의의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 언약에 의해 세워진 성전은 결코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충만케 하기 위함이었기에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성전의 주로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괴롭게 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도리어 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막말을 하면서 공의의 하나님이 없다고까지 공공연히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2:17).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에 의한 완전한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심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의 기준이 없으면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사자를 보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1절).
언약의 사자인 그가 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4절). 하나님 편에서 드리는 의로운 제물이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할 근거가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사자가 누구입니까? 1절에 내 사자를 보내는데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는 사자를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길을 예비하는 사자 다음에는 누가 오신다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언약의 사자로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5절에도 보면,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 1:1,18). 예수님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선포하기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요 1:29). 예수님이 직접 희생 제물이 되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의로운 제물이었습니다. 단번에 드린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히 9:11,12). 그것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임하신 것 자체가 바로 심판이 된 것입니다(요 3:18).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되지 아니하고 소멸될 수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6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자손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상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자기 백성들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없어지거나 취소되지 아니하고 반드시 성취되어 하나님 자신의 이스라엘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의로운 제물이 아닙니다. 의로운 제물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만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다른 종교는 다 무시하는 것이 되며 그것은 기독교의 독선이고 아집이라고 합니다. 사랑과 평화, 화목을 말하는 기독교의 근본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주장에 대해 사실은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변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이 그러하고 그렇게 일하신 분이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주신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변론해서 복음을 거스르는 자들을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서 모세 언약의 표현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이 약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5절).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에 압제당하고 나그네로 살아가는 약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자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본 모습이 약자인 것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의로운 제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이 말씀은 단순히 오늘날 예배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고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의로운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연약한 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관심 가져야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행하신 일, 즉 하나님께 기쁨이 된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셨다고 보여주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고아와 과부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해 살고 자신이 죽은 자인 줄을 전혀 모르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자비를 베푸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가 예수를 의로운 제물로 인정하고 사는 자입니다. 오직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로 되었음을 생활을 통하여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약자란 바로 신약 성경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로 살면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약자)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는 약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자신의 힘을 믿는 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로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약속을 홀로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윤리를 실천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고아원을 찾아가고 거지를 돌보는 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몇 푼 던져주고 밥 퍼주는 정도의 착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그 예수는 윤리를 실천하는 예수이고 경제 정의를 실현해 주는 예수로 우리 인간을 살려주는 예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는 나를 죽이는 예수입니다. 다른 예수입니다.
언약의 사자로 오신 하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죽이시는 심판의 주님이셨습니다.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우리 자아가 날마다 철저히 심판받도록 의로운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진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약자로 인정하고 의로우신 제물을 날마다 공개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삶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그리스도를 무시하거나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합시다(19990509/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