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 언약
말라기 2:1-9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결심이 사흘을 가지 못한다는 말인데 인간의 마음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쩌면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일일, 작심일초도 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우리는 다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요즘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도무지 삼일까지 가기는커녕 하루 아니 일초도 가지 않아서 우리의 결심이 무너지고 바뀌는 것을 허다하게 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심이라는 것이 하나의 율법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율법도 우리는 제대로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늘 스스로 율법을 파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율법을 만들고 결심을 세우며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일에 대한 비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내일 더 낫고 편안한 삶을 위해서는 오늘 자기 자신에게 율법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기대 심리가 없다면 오늘 있는 스스로에 대한 율법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점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있다면 오늘 사람들은 종교적인 형태에 철저히 매이는 것입니다. 반면, 시한부적인 종말의 기대가 없다면 무한정 늘어지는 삶을 살면서 방종과 제 멋대로 사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점에서 내일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에 율법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느헤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리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뭔가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고 기대한 만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지은 성전(스룹바벨 성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도 말하기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학 2:3)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당시에 지은 성전은 이전의 솔로몬 성전의 영광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였습니다.
나이를 먹고 어려움을 겪으면 옛날의 좋은 시절은 영영 지나가서 다시 붙잡을 수 없다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을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말씀을 전했던 시대의 예루살렘 사람들도 꼭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어릴 때에 보았던 자들은 늙어서 스룹바벨 성전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이제 성전의 영광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하여 포로 생활에서 놓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용감한 유대인들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용기를 잃고 절망해 버렸습니다. 일이 너무 힘들고 시일이 오래 걸렸으므로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과 그에 따른 율례와 규례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살도록 책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선지자가 있어야만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언약 백성답게 살도록 말씀으로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것은 고치고 미진한 부분은 이스라엘을 격려하여 잘 되도록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닌 것은 버리고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창조해서 취하시는 분입니다. 이미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없는 자는 버리고 하나님 자신의 이스라엘로 새롭게 만드셔서 그들을 통해 언약을 성취시키는 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라고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1장 초두에서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은 사랑하고 이방 민족들은 미워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듯이 버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는 자들이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느냐고 따지는 이스라엘이라면 에서와 같은 존재요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제사장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책망하신 내용입니다. 2장에 들어와서는 제사장들의 죄악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는데, 1-9절에서 가르치는 역할에 대한 죄악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10-17절은 제사장들의 가르침에 따른 백성들의 삶에 대한 일례를 가지고 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적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가 그들 위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란 원천적으로 복을 받은 족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고 그들을 통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기로 하셨기에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끄집어 낼 때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신 재앙 그것이 곧 애굽 사람들에게만 내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모르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재앙임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내리신다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애굽에 내린 재앙이 내려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면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 차원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그 언약에 순종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순종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에게 왜 애굽의 재앙이 내려지지 않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당장 재앙을 내리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하심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피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무시한 처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주가 이스라엘 머리 위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바로 말라기 선지자가 외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제사장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내린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을 제하여 버림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드린 제사 제물과 함께 거부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과 함께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주신 레위 언약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언약이 어떤 언약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5,6절에 나타납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민수기 25장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는 창으로 이스라엘의 한 남자와 그의 미디안 여인을 찔러 죽였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미디안 백성들과 어울려 우상을 섬기며 음행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벌했던 역병이 멎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이 민수기 25:12,13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제사장 직분의 언약은 평화의 언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미디안 여인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상태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는 역할을 제사장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레위와 세운 제사장 언약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죄악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의 역할을 7절에서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지금 이 시대의 제사장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맺으신 그러한 본래적 모습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레위의 언약이 깨어졌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곡되이 가르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율법을 가르치며 순종의 삶으로 먼저 보여주어야 할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더럽힌 것은 다른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물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을 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물과 제사의 방식 그대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레위 언약에 근거한 정신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레위 언약에 근거한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사장들을 거부하신다면 정말 레위 언약이 깨어진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그 제사장들이 잘못 했다고 해서 언약이 파기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언약이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40:15에 의하면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같이 그들(아론의 아들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민수기 25:13에서도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원한 언약이 될 수 있습니까?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불순종하였고 그래서 레위 언약이 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파하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깨어졌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이스라엘이 영원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다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남기셔서 그들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참 이스라엘 되시고 진정한 남은 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친히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레위 언약은 성취되었습니다. 생명과 평강의 언약으로 완성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온전히 드러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도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된 이유를 밝히는 삶인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자가 화목을 누리고 평화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무시하였다는 것이고 그들이 율법을 거스리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은 제사 의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였고 피를 가르치지 않았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온다고 쉽게 이러한 죄악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가진 예배당, 우리가 섬기는 목사로 인해 십자가의 피가 가려지고 있고 무시되고 있다고 보십니다. 제사장들이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고 제사를 집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무시하였던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죄악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교인들은 ‘제사장=목사’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라기의 이 말씀도 목사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구약 식으로 표현하자면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온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제사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히트치고 있는 전도 방식이 먼저 교회 자랑, 목사 자랑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교회 성장의 제1원칙인 것처럼 공공연히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무시한 처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배당을 자랑할 수 없고 목사를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레위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구약의 제사장들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실패했다면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19990425/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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