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 엘리야
말라기 4:1-6
기독교는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알고 믿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종교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생명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뺀다면 기독교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가치가 없습니다.
같은 성경을 이야기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말한다면 유대교에 불과합니다. 유대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 우리가 믿는 동일한 여호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도 그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유대교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이 다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유대교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신약을 다 가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만 신약도 새로운 율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지고 살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믿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기독교가 성립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서는 종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존재를 빼더라도 그 종교의 성립이 가능합니다. 불교 같은 경우에도 석가가 불교를 창시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깨달음과 같이 하면 누구나 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 때문에 오늘날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석가가 고행을 하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모범입니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를 빼고도 얼마든지 불교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모든 종교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창시자나 교주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 생명입니다. 그분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창시자가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무엇인가 행하여야 하는 것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분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고 그분이 믿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면서 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느냐 하는 것에는 자신있게 답변할 수 없습니다. 자신있게 답변할 수 없다는 말에는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말씀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확인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또 다시 죄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가 원하는 예수를 붙들고 구원받았다고 자기 기만에 빠질지 모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이스라엘이 수행한다는 것은 언약의 내용을 무시한 채 외적으로 형식만 갖추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언약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형식을 가지지 않아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정신을 구현하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사 의식 자체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가 나타나서 외친 것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행위였다고 폭탄 선언을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였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약을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으심으로 누구도 그 언약에 합당한 자가 없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언약의 실체가 오셨을 때에 그 언약의 실체만 믿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고 지금 말라기 선지자가 외치던 당시에도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언약에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3:1). 그가 누군가 하는 것을 여기 4장에서 구체적으로 “선지 엘리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5-6절에 의하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신약에 보면,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공통된 선포의 내용이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행 2:38, 3:19). 이렇게 회개를 외쳐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아버지의 마음이 자기 자녀에게로 돌아서는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혹시 누가 돌릴 수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향하도록 하시는 이 일을 누가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진노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릴 수 있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온전히 기뻐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도 돌리게 되는 이것이 종말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종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떤 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는 관심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미 주의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를 두고 종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기능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야 최후 심판의 날이 오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7, 마태복음 11:14 및 17:12-13에서 그 엘리야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은 변화산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 내용을 누가복음 9:31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그 이야기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부활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하고 수군대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거대한 대결을 벌이는 엘리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화려하게 나타날 엘리야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엘리야가 예수님이기를 은근히 기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방금 산 위에서 예수님과 엘리야가 대화를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을 내려오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니까 예수님이 혹시 엘리야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든 것입니다. 만약 엘리야라면 죽을 리가 없는 것이고 반대로 엘리야가 아니라면 따로 엘리야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를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답변하시기를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7:11-12).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미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하고 죽었으며 그 뒤를 이어 예수님 자신도 엘리야의 기능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엘리야의 역할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실현될 것인데 그 엘리야의 역할을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비로소 두렵고 무서운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11:2-5에서 옛날 엘리야의 상황을 재차 언급하고 새롭게 적용하는 이유는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세례 요한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배척을 받아 죽으셨고 바울 자신도 그런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엘리야의 시대와 또한 그의 심정이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엘리야 시절에 이스라엘 모두가 다 여호와를 버리게 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서는 구원의 대상이란 오직 여호와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고 그 은혜로 택함 받은 자뿐임을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큰 재앙이 임했을 때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엘리야는 한 과부에게만 은총을 베풀었고 엘리사도 그러했다고 하시면서(눅 4:24-27),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을 받고 은총의 능력을 베풀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이런 선지자의 맥락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의 활동은 그 자체로서 이스라엘이 주님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요, 여기에는 오직 심판과 재앙과 저주뿐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상황이기에 참으로 주의 능력으로 선택되어서 남게 된 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예수님과 12제자들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12제자의 전도를 듣고 주님께 복종하는 자만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곧 야곱 지파의 복을 진정으로 계승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지칭하신 것입니다(참고 마15:24).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기존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새롭게 찾을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점에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의해서 새롭게 찾아진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를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이야기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믿지 않는다면, 십자가가 없다면 유대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도라면 바로 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는 자여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 모여진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교회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엘리야 때와 같은 그런 완악한 세대에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잃은 자를 찾아서 그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심정입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해야 할 일을 따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야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다시 엘리야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심정으로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심정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어린 양과 동전, 잃은 아들을 다시 찾는 것을 통해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렇게 잃은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란, 먼저 자신이 잃어버림을 당했던 자였는데 주님에 의해 부름받은 자라고 하는 것을 먼저 알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심정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자임을 안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철저히 깨닫고 아는 자입니다. 회개를 외치는 자가 먼저 회개하지 않고서는 회개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밖에 없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도입니다.
전도란 단순히 전도지 한 장 전해주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늘 통회 자복하면서 십자가의 주님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엘리야가 당했던 고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이 땅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신 십자가 때문에 구현된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주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주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이루신 언약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세상의 것을 모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바알의 것들을 교회 안으로 모아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속이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교회란 오직 예수님의 것만 남기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은 예수님만 계시면 세상의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괜찮다는 유유자적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위해 살다가 고난을 받으며 죽어갔습니다. 세상에서 왕따 당하며 세상의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엘리야와 같은 자로 세상에 세워두셨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19990523/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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