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02.사무엘상 2:1-10 한나의 찬양 기도

불편한 진리 2014. 4. 8. 16:48


사무엘상 2:1-10
한나의 찬양 기도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면서 한나는 기도하였다. 그 기도의 내용은 찬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나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성전에 바치고 드린 찬양 기도라는 점에서 내용이 단순히 한 아들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한나 한 개인에 대한 문제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들이 없어 브닌나로부터 멸시와 고초를 당했던 것에서 이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기도의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한나는 아들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것은 단지 없던 아들을 하나 얻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한나가 사무엘을 얻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는 분인지 사무엘을 낳음으로써 배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찬양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1절을 보면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라고 말한다. 한나는 자신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단순히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그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을 바라보고 그 아들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기 때문에 주신 것을 바라보고 감사와 찬양을 한다. 즉 무엇을 받았다면 그 무엇을 주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바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다면 그것을 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요 또한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있든지 없든지 그분만을 즐거워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개역개정성경에 ‘내 뿔이 높아졌다’는 표현은 승리를 말하는 것인데 원수가 누구인가? 그런데 여기서도 단순히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고 ‘원수들’이라고 한다. 이는 한나가 브닌나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나가 지칭하는 원수는 누구인가? 1:6에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한나의 대적자들은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닌나는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인가? 앞에서도 보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아들이 있고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것으로 한나를 무시하고 멸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브닌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었으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그 아들을 힘으로 삼아 한나를 무시하였지만 한나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힘으로 삼았다는 것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원수는 한나의 원수가 아니라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원수라는 뜻이다.
2-3절에서 ‘2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석이란 흔들리지 않는 기초라는 의미인데 한나에게는 그 어떤 것도 반석이 아니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엘가나나 심지어 아들 사무엘도 자신의 반석이 될 수 없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원수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심판하실 수 있는 분으로 고백한다.
그렇다면 한나는 여기서 왜 거룩하신 하나님을 반석으로 또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할까? 그것은 이제 4절 이하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4-5절에 의하면 ‘4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라고 하였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강자와 약자,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 자식을 많이 낳은 자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의 상황이 거꾸로 뒤바뀔 것이다.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꾸시면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다(6-7절).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처했던 상황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세상에서 압제와 멸시를 당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상태에서 영광의 자리가 되도록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이렇게 일하는 신이 있을 수 없다(8절). 모든 것을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반석이 되시며 모든 것을 종결지을 수 있는 분이다. 땅의 기둥들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의해 그것들을 반석 위에 세우신다.
따라서 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 되고 없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자식을 주기도 하시고 거두어가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나 자기 백성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기도 하시고 거두어 가기도 하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세상에 힘의 근원을 두는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모든 원수들 가운데서 한나가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이것은 분명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9-10절에 보면 ‘9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승리를 반드시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메시아’(히브리어)를 말한다. 메시아란 신약에서 ‘그리스도’(헬라어)라는 말이다.
이 기도에서 한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이상의 것까지 언급하며 왕이자 메시아인 다윗을 내다보고 있다. 사무엘서의 말미인 사무엘하 22:2 이하에 보면 다윗이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3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사무엘서(사무엘상하는 한 권의 책이다)의 끝에서 다윗이 한나의 노래를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시켜 노래하였다. 다윗은 이 찬양을 통해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사실들이 다 드러난 신약적 입장에서 한나의 기도를 보자면 왕이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내다보고 찬양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복음 1:46-55에 보면 마리아가 다음과 같은 찬양하고 있다.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46-55)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찬양인데 한나의 찬양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마리아의 찬양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시고 무엇을 위해 오시는가를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하시는 일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한나의 찬양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찬양이었다. 한나가 말하는 하나님이 주실 왕은 다윗 왕이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존재였기에 여기서 기름 부음 받는 왕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로서 하나님의 원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 주리는 자를 먹이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나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고 부자들을 낮추시는 일을 하실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 구원과 심판을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인정하지 못하고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인해 수시로 감정이 변하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이다. 돈을 포기하지 못하고 돈 때문에 우리 감정의 기복이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하는 이런 정신이 바로 예수님을 향해 대적하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든지 그것은 모두 없는 것에서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마치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힘에 의해 생겨난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에게 영원히 주어진 것처럼 여긴다. 아니면 우리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사랑해서 주신 것이라고 신앙적으로 덮어버리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나 개인을 생각하는 구원은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분으로 오셨다.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없는 분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소위 있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아무 것도 없는 약자로 오신 예수님이 있다고 하는 강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증거하셨다. 이렇게 볼 때 아들이 없는 한나가 당한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을 보여 주는 것이며 한나의 찬양은 성도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이 된다<20120129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