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4:1-22
빼앗긴 언약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받기 시작하였을 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큰 문제가 발생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다(1절). 약속의 땅을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한 방어적 전투가 사사시대의 전쟁이이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들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다. 블레셋이 공격해 오니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언제나 전쟁을 지휘하는 자는 사사였다. 사무엘상의 상황에서는 엘리 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 엘리 제사장은 이미 늙어서 전쟁에 나갈 수 없었기에 그의 아들들과 장로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에 대해서는 이미 심판의 경고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기 때문에 엘리의 아들들은 모든 상황이 어렵게 된 상태에서 극적인 돌파구가 필요하였는지도 모른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을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이 전쟁에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라도 승리를 만들어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참패였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붙이신 전쟁’이다(신 7:16, 수 10:30 등). 그러기 때문에 그 어떤 전쟁이라도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붙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패 여부는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하다. 전쟁에서 패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뭔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결과이기도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였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서 신상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기거나 아니면 하는 일에서 예기치 못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물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신앙의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을 인과응보라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에 내게 닥친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능력을 주셔야만 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것을 받아내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물량적으로 생각하고 외형적으로 채워지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로 여긴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그들이 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한 원인을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우리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이었고 엘리를 비롯한 제사장들의 신앙수준이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약궤가 그들에게 왜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언약궤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도 무지하였기에 언약궤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이는 블레셋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7-8절). 즉 블레셋 사람들의 같은 수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고 언약궤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두려움에 빠졌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는데 의외로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었다. 앞의 전쟁에서 죽은 자가 4천 명이었으나 두 번째 전쟁에서 3만 명이 죽었다. 언약궤를 앞세운 것이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왔다. 이스라엘의 판단이 전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이스라엘이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물량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더 많은 군사력과 더 많은 신무기로 싸우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셨다는 증거가 되고 내부에 악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는 악한 것이 무엇인가?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라고 하였고 또 18절에서는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라고 기록한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삼상 2:34). 엘리의 집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삼상 3:12-13). 이스라엘에게 있는 악이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요 엘리 제사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신 것이었다.
사무엘상 1-3장에서는 사사이자 제사장이었던 늙고 비대한 엘리의 무력함과 그의 아들들의 방종이라는 모든 내부적인 요인들이 이스라엘에게 왕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또한 4-6장에서는 이웃 나라와의 관계에서 외적인 요인이 이스라엘에게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 집안을 심판하시고 사무엘을 선지자로 세우신 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예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선택하심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근거로 한다(창 17:5-8).
엘리에게 있어서 큰 충격은 아들에 대한 것보다도 언약궤에 대한 것이었다.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13절)라는 말씀을 볼 때 엘리는 언약궤가 지정된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참고 신 12:5,11). 때문에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이 무엇보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18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충격은 엘리에게만 충격이 아니었다. 임신해 있던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충격 속에서 아들을 얻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셨다는 의미로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 그 이름을 짓고 죽었다.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는 상황에서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다는 것은 제사장 가문의 수치요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던 것이다.
언약궤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4절)이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영광의 궤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궤는 이스라엘에게 중심이며 그들의 전부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언약궤였다. 그런데 그 궤를 빼앗긴다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언약궤에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하는 제사장으로서 엘리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성막과 언약궤를 우상화하는 이스라엘에게 중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언약궤가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답게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언약궤에 피 뿌림으로 인해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본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기들에게 우선 닥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신약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통해서만 드러났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움,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것이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라는 뜻이다. 거기서 이루신 일이 언약을 성취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사시대와 마찬가지로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없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라는 도구를 이용하면 하나님의 승리를 거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세상에서 승리해 보자는 심보만 가득하다. 그러기 때문에 적당히 헌금으로, 봉사로, 기도로, 성경읽기로, 주일성수로 나쁜 기운만 막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행복과 즐거움이 주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에는 그런 것이 없다. 부적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십자가는 목걸이나 귀걸이로 사용할 수 있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철저한 자각에 의해 죽는 것이 십자가이다. 내가 죽은 시체 위에서 주님이 일하신다. 세상은 이미 이가봇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나라에만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세상에 기대를 걸고 세상에 우리의 몸을 둘 곳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20100226/김영대).▪
'●──── 구약강론 > 사무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07.사무엘상 6;1-21 돌아온 언약궤 (0) | 2014.06.06 |
---|---|
06.사무엘상 5:1-12 블레셋에 있는 언약궤 (0) | 2014.04.20 |
04.사무엘상 3:1-21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0) | 2014.04.08 |
03.사무엘상 2:11-36 엘리의 아들들과 사무엘 (0) | 2014.04.08 |
02.사무엘상 2:1-10 한나의 찬양 기도 (0) | 2014.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