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1-28
사무엘의 출생
사무엘서는 우선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사사시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삿 17:6, 18:1, 19:1, 21:25).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살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한 말씀이다. 즉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사 시대를 종식시키면서 두 책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래서 룻기는 사사 시대가 어떻게 끝내시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룻기이다. 룻기를 통해서 구속자 보아스를 세우심에 있어서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투입시켜 사사 시대를 끝내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즉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후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사사 시대를 끝내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무엘서인데 사무엘상에서는 사무엘의 탄생을 기록함으로 사사 시대를 종식시키는 방법을 보여 주신다. 여기서 보여 주는 방법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호와의 왕권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
사무엘상 처음에 ‘1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고 기록한다.
여기에 엘가나를 소개할 때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에브라임 사람으로 생각하나 사실은 레위 지파 사람으로(대상 6:27)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제사장답지 않게 두 아내를 두고 있었다. 한나와 브닌나였다.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하여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몫을 브닌나보다 더 주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엘가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한나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것 때문에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엘가나가 한나를 더 사랑한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중요한 사항은 자식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식이 있는 자에게서 핍박을 당함으로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한나가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무엘상의 앞부분은 사사 시대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즉 사사기의 기록에서 말씀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상태였다. 당시 엘리 대제사장은 한나가 기도하고 있을 때에 술에 취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계시에 민감하지 못했다. 엘리의 집안이 타락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에서 공식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불량자들이었다(삼상 2:12 이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장 반열이 타락했다는 것은 모두가 다 타락했다는 의미이다. 4장을 보면 하나님의 법궤를 주술적으로 사용하고 결국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장면이 나온다. 법궤가 이방 땅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땅에 끌려가신 것과 같은 것이었다. 참으로 암울한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암울한 상태에서 현실만 보면 막막할 수밖에 없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서를 시작하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셨다. 그것이 바로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한나가 불임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녀가 아들을 얻은 것이 오늘날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자가 한나와 같이 열심히 기도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5-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사 시대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엘가나의 가정에 한나와 브닌나 이야기는 단순히 불임으로 고통 받고 있는 성도의 한 가정을 보여 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종종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적 의미를 부여하신 일로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해 고의적으로 행하시는 독특한 사역으로 성경에 자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아내가 다 불임 여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불임 여성들을 선택하셔서 언약이 어떻게 이어져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창세기 11장에 바벨 성과 탑을 쌓는 사건이 나온다. 바벨 성과 탑은 인간 왕국의 건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세우려는 하나의 왕국을 저지하고 그 나라를 대항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고자 12장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데 거기에 불임 여성인 사라를 통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를 끝내고 인간의 나라를 대항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고자 불임 여성을 통해 주신 삼손과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는 것은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이유는 언약의 나라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만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셨지만 언약의 당사자 아내들(사라, 리브가, 라헬)은 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인간의 힘을 거부하고 인간의 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곧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통당하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언약의 속성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3절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을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우주의 주권자로 하늘의 천사들을 거느리시며 동시에 땅의 이스라엘 군대도 이끄시는 분으로 세우신 뜻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하늘이나 땅의 어떤 것이라도 동원하셔서 언약하신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다.
브닌나의 괴롭힘으로 인해 한나는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코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아니었다. 핍박과 고통 중에서 나오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개인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적용해서는 안 된다. 한나는 아들을 낳아서 브닌나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머리에 칼을 대지 않겠다고 서원한다. 즉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것이다.
사사 시대의 말미에 태어나 그 시대를 마무리 짓는 삼손과 사무엘이 다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고 또한 나실인으로 드려졌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사사기 13:2-3에 보면 ‘2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 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3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기록한다.
같은 사사 시대를 살았던 마노아나 한나는 불임 여성이었으며 삼손과 사무엘 둘 다 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머리털을 자르지 않으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시체를 접촉하여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한 마디로 나실인은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 구별된 자로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나실인은 서원에 의해 일시적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지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도록 된 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은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도록 드린 자들이었다.
그런데 한나가 아들을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얻어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버리는 기도를 한 것이었다. 기도란 이와 같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반대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 기도이다.
그렇다면 한나가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사사 시대에 볼 수 있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즉 자기를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을 고발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된 모습이 본래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출 13:2, 12-13). 그러므로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의 장자의 역할을 하도록 구별 된 존재이다(출 4:22).
19절에서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쉬운성경에는 ‘여호와께서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고 번역하여 언약을 기억하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암시한다. 마침내 한나는 임신을 하였고 아들을 낳아 ‘여호와께 구하여 얻었다’는 뜻으로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그리고는 젖을 떼고 실로로 데려가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다. 사무엘이 몇 세에 성전에 드려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은 아이가 7세까지도 젖을 먹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면서 한나가 하는 말을 보면 ‘27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28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27-28절)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백한다.
한나가 이렇게 하려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였던가? 한나가 귀하게 얻은 아들을 젖을 뗀 후 제사장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브닌나에게서 받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아들을 드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한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상에서 희망이고 든든한 힘으로 여기는 아들조차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사무엘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이스라엘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쓰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서 자식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과연 자녀를 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 주고 남부럽지 않게 해 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자녀를 나의 자녀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가지는 소망은 영원한 안식이어야 되고 그 안식을 바라보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마다않는 자세로 말씀을 가르치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20120115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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