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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창세기 45:1-8 요셉과 형들의 만남(8)

불편한 진리 2025. 5. 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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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17

창세기 45:1-8

요셉과 형들의 만남(8)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1-2절). “시종하는 자들”이란 말의 ‘나차브’는 ‘서다, 놓다, 세우다, 정하다, 관리, 기둥’이라는 뜻인데 요셉에 의해 세워진 애굽의 관리들이라는 의미이다.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라는 말의 ‘아파크’는 ‘붙잡다, 자신을 굳게 지키다, 강력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육적인 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요셉이 겉으로는 애굽의 관리들에 의해 강력한 존재로 세워진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로 말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셉이 애굽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성취를 위해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애굽적인 모든 것을 물러가게 한 다음에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형제들과 진리를 나누는 관계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진리를 나누는 일에 애굽적인 것, 육의 가치관 그 어떤 것도 개입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혈육에 대한 정을 억제하지 못한 울음이 아니라 목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나누었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라는 말씀은 애굽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선포되고 전해졌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3절).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라는 이 말씀 역시 육적인 아버지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버지에 대한 안부를 확인한 바가 있기에 육적인 아버지에 대한 안부를 재차 물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창 43:27).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으로 형제들과 하나 되었기에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으로 야곱 언약의 당사자로 드러나야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라는 표현은 진리 앞에 서게 된 성도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언약의 말씀이 온전히 드러나고 그 앞에 자신들의 죄가 처절하게 폭로되니 진리의 말씀 앞에 아무 답을 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라는 말씀 속에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음에 넘겼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율법의 문자에 매여 시기와 분노로 요셉을 대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듯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그 당사자가 바로 ‘나’고 ‘우리’이다.

그렇다면 요셉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고 물어야 할 필요성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성경의 관심사는 요셉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요셉의 태도나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혀 특별하게 대하였다는 관계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존재로 암시하고 그것이 곧 언약을 위해 선택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진리를 아는 자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 성경에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5절)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가운데 ‘아인’(눈, 샘, 샘물)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데 그 의미는 형제들이 보는 눈은 요셉을 죽음에 넘겼다는 것으로 근심과 한탄의 눈으로만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진리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절)라는 말씀은 형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으로 생명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에 그것을 위한 도구로 애굽에 먼저 보내셨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생명은 긍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그 긍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0-32)

 

이런 점에서 요셉이 애굽에서 보낸 기간들은 형들이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죄악의 증거를 보여주는 기간이었다. 형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요셉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였다. 인정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꿈 때문에 오히려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꿈으로 인해 자신들이 어린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들의 죄악상이다.

그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는 이 방식은 하나님의 언약 방식이다. 언약을 몰랐던 형제들은 요셉을 제거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는 요소가 없어지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된 모습을 철저히 드러내셨다. 그들의 죄악상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반대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형들이 가지고 있는 언약에 반대되는 사고방식은 어떤 것이었나? 그것은 대표적으로 유다가 다말에게 행한 것에서 드러난다(38장). 즉 자신의 힘을 믿고 약한 자를 무시하고 버리는 것이다. 요셉에 대하여 처리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다말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유다의 힘에 의해 쫓겨났고 무시당했다. 모든 것이 유다가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시지 않고 다말을 유다의 인생 속에 넣어서 유다가 결코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셨다. 결국 유다는 자신보다 다말이 의롭다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굴복되고 말았다. 다말의 사건을 통해 밝히신 것처럼 요셉에 대한 사건도 형들이 모은 힘으로 요셉을 팔아버렸으나 형들에 의해 버림당하고 그 힘에 의해 희생당한 죽음 안에 하나님의 언약 성취가 있었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6-8절).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라는 표현은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흉년, 즉 기근으로 인해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아 요셉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으로 인도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라는 말씀은 함께 이스라엘로 만나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알게 되는 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언약의 말씀을 연구하고 노력하여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주는 양식, 곧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진리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큰 구원으로”라는 말의 문자적으로는 ‘구원이 크다’라는 말이지만 의미적으로는 ‘큰 것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면 ‘큰 것’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형제들이 야곱이라는 아버지의 집을 중심으로 행하여 온 모든 행위가 큰 것이다. 스스로 큰 자로서 요셉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율법적으로 오해하였기에 어린 자를 죽음에 넘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작은 자, 어린 자에게 담겨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야곱 언약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형식이다(창 25:23). 결국 큰 자였던 자들이 작은 자 요셉과 베냐민을 섬기는 것으로 야곱 언약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큰 구원”이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8절)라는 말씀은 단순히 배짱으로 하는 말이거나 허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위치에 두셨으며 그 위치에서 무엇을 하도록 하신 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바로의 아버지, 온 집의 주, 온 땅의 통치자’는 같은 말이다. 언약의 아들을 세워 애굽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요셉을 이런 자리에 두신 것은 하나님 자기 언약을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이라는 야곱의 가족을 살리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의 가족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야곱을 이스라엘로 세워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을 담아 놓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7절)라는 표현에서 “후손”의 ‘셰에리트’는 ‘나머지, 남은 것, 남은 자, 후손’이라는 뜻인데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고 있다. 즉 ‘남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 10:20-22)

 

요셉의 형제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살았지만 요셉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는 언약적 일하심에 붙잡혀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형들은 이 사실 앞에 한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의 관심은 생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을 위해 온갖 힘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이 버린 요셉을 통해 그들이 언약을 이해하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언약의 방식에 굴복되게 하시는 것이었다. 형제들이 모두가 다 언약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드시는 일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그대로 두고 보시며 참으셨다.

가뭄, 그것은 흩어진 이스라엘을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들이 다시 만나게 되었으므로 결코 그동안의 세월이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탄식과 한숨으로 지내온 아버지와 서로 시기하며 질투하는 형제들이 요셉을 통해 야곱의 가족으로 아니,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로 다시 하나가 되는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언약의 나라를 이끄시는 원리를 알게 된 것이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8-29)

 

결국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은 사실 야곱이 아니라 요셉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라는 말씀에서 “아들들”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야곱에게 한 명의 형 이외에는 형제가 없었으므로 야곱에게 직접 해당하는 축복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요셉의 버려짐은 사실 이스라엘이라는 야곱의 가족을 살리기 위한 희생제물로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025051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117.4501-08 요셉과 형들의 만남(8)(202505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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