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101. 창세기 38:1-14 유다와 다말(1)

불편한 진리 2025. 1. 1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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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1

창세기 38:1-14

유다와 다말(1)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의 의미는 그들의 고차원적인 윤리적인 삶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성격, 즉 자신들의 죄악성을 통해 언약의 아들(후손)을 계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한다(출 19:5-6). 성경을 이런 언약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잣대로 이스라엘을 판단하게 된다.

요컨대 유다와 다말에 대한 이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잘못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경은 유다의 행위에 대해서 윤리 도덕적인 어떤 평가도 내리고 있지 않다. 윤리와 도덕은 그 나라의 문화이며 그것은 또한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들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될 수가 있고 또한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행동들이 다른 나라에서나 역사의 다른 상황에서는 도덕과 윤리를 벗어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우리의 시각에서 도덕과 윤리적 규범을 가지고 대한다든지 개인적인 입장에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 사건을 주셨으며 어떤 관점으로 보시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어떤 부분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되고 결국 인간 중심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1-2절). “그 후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에트 하히우’인데 문자적으로 보면 ‘그때’라는 표현으로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간 후의 일로 생각할 수 있다. 요셉 사건을 다루다가 유다와 다말 사건을 언급하고 다시 39장부터 요셉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면 38장은 시간적 순서로 기록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즉 언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때’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특별히 보여주셔야 할 그 시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셉 이야기 가운데 유다 가정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자는 요셉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유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급하게 한 가지 하고 넘어가겠다는 의도가 비친다. 뿐만 아니라 유다에 관한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와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의 ‘톨레도트’ 설명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셉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야곱의 언약과 관계된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유다에 관한 이야기는 사건의 전개 방향을 애굽으로 돌리기 전에 가나안 땅에서 있었던 사건을 마무리 짓는 아주 적절한 배열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요셉의 생애만을 통해서는 아니다.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이제 야곱을 다루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차원에서 야곱의 아들들을 다루신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이나 이삭과의 언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약 안에 있을 후손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이 드러나려면 장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장자 르우벤(창 36:22)과 그 다음 장자의 역할을 할 시므온과 레위(창 34:25)의 죄악상을 폭로하였기에 요셉이 없는 상태에서는 유다가 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헤브론에 있어야 하나 그는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라고 언급하여 이방인 안으로 들어간 모습을 보여준다.

“아둘람”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되어 그 땅이 유다 지파의 기업이 되었다(수 12:15, 15:35). “히라”는 ‘귀족, 찬란함’이라는 뜻이다. 유다의 때에 아둘람은 상당히 영향력 있고 위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다는 아둘람 사람의 찬란함과 부요함에 동화되어 통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라고 언급한다. “수아”는 ‘소리내어 외침, 부요함’이란 뜻이다.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3-5절).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는 어두운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도 “아들을 낳으매”라고 표현하여 언약을 이어가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엘”의 ‘에르’(역대상 2:3에서는 ‘에르’로 번역하였다)는 ‘경계하다, 각성하다’라는 뜻이고, “오난”은 ‘강한, 힘센’이라는 뜻이고, “셀라”는 ‘청원, 요구’라는 뜻이다. 그가 거한 “거십”은 히브리어로 ‘케지브’인데 ‘속이는, 실망시키는, 허무한’이라는 뜻이다. 세 아들의 이름을 통해 문자적으로 보면 가나안 땅에서 항상 경계하고 강한 힘을 자랑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나타내나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실망시키며 허무한 것임을 말씀한다. 두 아들의 죽음이 허무한 것이며 막내는 씨를 뿌려보지도 못한 저주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6-7절). “다말”은 히브리어로 ‘타마르’인데 ‘토메르’(종려나무, 기둥, 똑바로 세움)에서 유래한 단어로 ‘종려나무(대추야자)’라는 뜻이다. 종려나무는 의인에 비유된다(참고 삿 4:4-5).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 92:12)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해 다말을 데려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하나님께서 거짓된 집안에 하나님의 자기 의를 집어넣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인해 거짓됨이 드러나야 하고 또한 유다의 집안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의로움의 상태로 똑바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은 죽음을 맞이하는데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단지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라고만 말씀한다. 그렇다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은 오난을 통해 악이 무엇인지 나타내신다.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8-10절). 당시 수혼(시형제 결혼)의 관습대로 유다는 오난을 다말에게 주어 형을 위하여 씨를 이을 것을 요구했으나 오난은 땅에다 설정함으로 장자의 가문을 잇는 대속자로서의 의무를 거부하였기에 또 죽임을 당한다-오난의 이름에서 ‘onanism’(성교중단, 자위행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그러면 동생이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대를 이어야 하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만약 혈통적인 대를 의미한다면 굳이 형수와 결혼을 해야 할 필요 없이 동생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대를 이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장자의 여자를 통해 대를 잇는 것은 단순히 혈통적 대를 잇기 위함은 아니다. 혈통적 대를 잇기 위한 것이라면 여자보다 장자인 남자의 위치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장자인 엘과 둘째 아들인 오난도 죽이셨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혈통적 위치에서 장자의 자리에 있는 엘이란 남자에게 의미를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에서는 한 남자가 그의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레 18:16, 20:21) 이 율법의 예외로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경우 시형제 결혼법으로 말씀한다(신 25:5-10). 이렇게 후에 율법으로 성문화되면서 대를 잇는 의무를 감당하는 자를 “속량자”(히브리어-고엘)라고 불렀고(참고 레위기 25장)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를 속량해 주는 하나님을 고엘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시 111:9, 렘 31:11 등). 그러므로 시형제 결혼법은 단순히 대를 잇기 위한 수단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이루시는 구원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땅에 설정하매”라고 번역한 ‘샤하트’는 ‘부패하다, 파괴하다, 파멸하다, 멸망시키다’라는 뜻으로 노아 홍수의 멸망에 대한 표현이다. 즉 땅을 파괴하였다는 의미이다. 오난이 씨를 땅에 쏟음으로 땅을 부패하고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씨가 자신의 의가 되지 않는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톨레도트를 통해 아들 낳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따라서 오난의 죄는 단순히 땅에 설정하였고 형수의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에 대한 거부이고 대적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한 것이고 그것을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죄악이다. 이로 인하여 유다의 아들들의 씨는 거짓 된 씨로 말씀이 아닌 것을 뿌린 땅은 멸망의 상태가 될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되짚어 보자면 7절에서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라고 하였을 때 악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난을 통해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이후 다말의 행동에 대해서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순히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다말이 언약의 말씀에 잘 순종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말을 통해 언약으로 말미암는 의를 계시하는 차원에서 순종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11절).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라는 유다의 말은 남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14절)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즉 유다는 셀라도 혹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다말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유다도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적인 자기 아들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야곱의 아들들, 곧 이스라엘의 모습을 유다를 대표로 이스라엘의 죄악성을 보여준다.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유다는 시아버지라는 자기 힘으로 힘없는 다말을 제압하고 있었다. 아니 자기 아들을 자기 의로 삼았기에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있었다. 힘없이 고통받는 다말 안에 하나님은 언약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를 담아 놓으셨다.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12-14절).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양털을 깎는 행사는 거대한 잔치로 여러 날이 걸렸다(참고 창 31:19, 삼상 25:4, 11).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라는 표현은 수아의 딸이 죽고 다말이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아야 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일하심을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유다는 “친구 아둘람 살마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라고 하여 여전히 육적으로 연합한 친구와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말은 “어떤 사람이 … 말하되”라는 표현의 ‘나가드’는 ‘말하다, 폭로하다, 선언하다, 인정하다, 고백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 일이기에 성령께서 다말을 이끌어 올리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딤나”의 ‘팀나’는 ‘할당된 몫’이라는 뜻으로 유다는 유다대로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육적인 자신의 할당된 몫을 하고 다말은 다말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이끌려 간다.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202501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101.3801-14 유다와 다말(1)(202501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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