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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10
디모데전서 4:7-16
믿는 자들의 구주
혼인이나 음식을 금하는 율법적이거나 금욕적인 것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거룩해진다.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 진리로 형제들을 하나님 왕국에 잘 진열하고 배치하는 것이 양육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는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을 지키기 위해 그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하여 금욕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며, 평소에도 술, 담배를 하는 죄를 짓지 않음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인양 가르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7절). 여기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접속사 ‘데’가 있는데 ‘그리고, 그러나, 지금’이라는 뜻이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육을 받는 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지금 버리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허탄한 신화란 술, 담배 하지 않고 교회에서 목사들이 요구하는 대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소위 말하는 매일 Q.T를 하면서 스스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신앙생활 잘하는 자신이 전설이 되고 싶어 한다.
“망령되고”는 ‘베벨로스’는 ‘신성하지 않는, 불경스러운’이라는 뜻인데 히브리어 ‘홀’(속된 것, 레 10:10, 겔 22:26)의 역어로 속된 것이나 사악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허탄한”의 ‘그라오데스’는 문자적으로 ‘늙은 여자같이 보인다’라는 말로 ‘어리석은, 노쇠한’이라는 뜻이다. 늙어 노쇠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헛된 가르침이 들어있는 미신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전통 문구이다.
“버리고”라는 단어는 디포태 동사로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에 의해 거절하게 되고 버려진다는 의미이다. 주권자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고 계시기에 나에게서 율법적 행위로 만들어 나의 의로 신이 되고자 하는 전설, 신화는 거절하고 버리게 되는 것이다.
“경건”이라는 말의 ‘유세베이아’는 ‘경외함’이라는 뜻이다. “이르도록”이라고 번역된 말은 ‘~에서부터, ~을 향하여’라는 뜻이다. “경건에 이르도록”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함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경건이다. “연단하라”의 ‘귐나조’는 헬라 문화에서 ‘벌거벗고 운동하다’라는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연습하다, 운동하다, 훈련하다’라는 뜻이다. “네 자신을 연단하라”라는 말씀은 ‘네 자신이 소유한 것을 훈련하라’라는 뜻이다. 네 자신이 소유한 것은 ‘호 로고스’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정리하자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육을 받는 자라면 속된 전설은 거절하고 경외함을 향한 방향으로 연습하고 훈련하는 상태에 있다’라고 당시 운동 경기에 비유한 표현이다.
“8 (왜냐하면)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그러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8-9절). “육체의 연단”은 몸의 ‘훈련’이나 ‘연습’이라는 뜻이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라는 말씀은 육의 것이 약간이라도 유익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육의 것은 육체의 운동에 불과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육체의 훈련은 율법적 행위로 육의 것이다.
그러나 “경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한 경외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는 말은 ‘지금과 장래 생명의 약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7절에서 말씀한 경건의 훈련이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밝힌 것이다. ‘왜냐하면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신앙은 지금도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장래에도 생명의 약속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4-17)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은 ‘신실하다, 그 말씀이여’라는 말이다. “받을 만하도다”라는 말의 ‘아포도케스 악시오스’에서 ‘아포도케’는 ‘받아들임, 시인, 찬성’이라는 뜻이고, ‘악시오스’는 ‘같은 가치의, 합당한, ~할만한, 훌륭한, 가치 있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신실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할 만한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10 (왜냐하면)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10-11절). “우리”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수고하고”의 ‘코피아오’는 ‘열심히 애쓴다’라는 뜻이고, “힘쓰는 것”의 ‘아고니조마이’는 ‘싸우다, 다투다’라는 뜻인데 중수디포태이다.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표현에서 관사가 없다. 즉 우리라는 교회는 생명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소망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열심히 애쓰고 싸우는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그것이 교회가 가진 소망이라는 말씀이다.
육체의 연단, 즉 몸의 운동은 살아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육이 아무리 운동하고 연습하며 훈련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상태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이와 대조하여 진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울 사도는 말씀하는 것이다. 즉 살아 있다는 것은 믿음이 된 자들이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며 가르치는 것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것, 이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소망이다.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서 믿음은 소유격 복수로 표현되었다. 직역하면 ‘모든 사람의 믿음들의 구주시라’라는 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음이 된 자들의 구원의 주인이고 보존자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교회가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의 주인이시고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보존자가 되신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9-10)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12-13절). “연소함”이란 말의 ‘네오테스’는 ‘젊음, 젊은 연령, 연소’라는 뜻으로 청소년, 청년기를 말한다. 당시에는 군대를 갈 만큼의 나이에서 약 40세까지 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디모데가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표현으로 볼 수는 없다. “업신여기지”라는 말의 ‘카타프로네오’는 ‘경히 여기다, 멸시하다, 경멸하다’라는 뜻이다. 즉 젊고 힘이 있다는 것은 복음을 왕성하게 드러내는 상태에 있음를 의미한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드러낼 때 그것을 멸시하거나 경멸하는 일이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더욱 분명하게 복음을 말하라는 것이다.
더욱 분명하게 복음을 말하되 어떤 상태에서 하는가를 다음 구절에서 말씀한다. 그래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이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말씀 안에서, 행실 안에서, 사랑 안에서, 믿음 안에서 정절 안에서’라는 말이다. “행실”이란 말의 ‘아나스트로페’는 3:15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라고 하였을 때 ‘아나스트레포’(위를 향해 돌이키다)에서 온 단어로 ‘돌아감, 생활방식, 처신, 행동’이라는 뜻이다. “정절”의 ‘하그네이아’는 ‘순결성, 정숙, 예의 바름’이라는 뜻이다. 즉 말씀 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을 향해 돌이키는 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복음의 순결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교회의 살아 있음이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는 말의 “본”의 ‘튀포스’는 ‘자국, 흔적, 원형, 모형’이라는 뜻이고 “되어”라는 말은 중수디포태로 표현되었다. 즉 믿음이 된 자들의 흔적, 자국은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며, 복음의 순수함이 드러나는 것이 믿음이 된 자들의 흔적이다. 그것을 디모데 개인이나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의미에서 디포태 동사를 사용한 것이다.
“읽는 것”의 ‘아나그노시스’는 ‘아나’(위로)와 ‘그노시스’(알다)의 합성어로 ‘위에서 아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진리를 아는 것을 말한다. “권하는 것”의 ‘파라클레시스’는 ‘파라칼레오’(부르다, 초청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권면, 위로, 호소, 격려’라는 뜻이다. “내가 이를 때까지”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바울 사도가 올 때까지’라는 말이지만, 복음적 의미로 보자면 바울 사도가 올 때까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를 알게 하는 것과 그 진리에 초대되도록 하는 것,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만 전념하고 집중하여 언제든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14-15절). 우리 말의 어법상 “가볍게 여기지 말며”라고 뒤에 서술하고 있지만 헬라어로 보자면 ‘소홀히 여기지 말라!’라고 문장을 시작하면서 강조하였다. “은사”의 ‘카리스마’는 ‘은혜의 선물, 호의의 증거’라는 뜻으로 “네 속에 있는 은사”란, 즉 디모에게 주어진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말씀이다. “안수”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 손을 위에 놓음’이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즉 디모데가 장로의 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받은 것은 은혜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그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전심전력하여”라는 말의 ‘멜레타오’는 ‘멜레테’(관심, 염려, 돌봄)에서 유래한 단어로 ‘보살피다, 돌보다, 숙고하다, 도모하다’라는 뜻이다. “성숙함”이란 ‘프로코페’는 ‘프로콥토’(앞으로 나아가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전진, 진보’라는 뜻이고, “나타나게 하라”의 ‘파네로스’는 ‘보이는, 명백한, 분명한, 개방된’이라는 뜻으로 숨은 것, 숨겨진 것의 반대어로 쓰이는 표현이다. 즉 복음의 말씀으로 나아갈 때 말씀이 숨겨지지 않고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라는 것이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왜냐하면)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절). “네 자신”이라는 말의 ‘세아우투’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동행을 의미한다. “살펴”라는 말의 ‘에페코’는 ‘굳게 잡다’라는 뜻이고, “계속하라”라는 말의 ‘에피메노’는 ‘머무르다’라는 뜻인데 현재형으로 사용하여 계속 머무르고 있으므로 곧 동행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세상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사람, 즉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들어간 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우리 성경에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라고 번역하였는데 “네 자신”은 앞에 붙어야 되는 말이다. 직역하면 ‘네 안에 있는 말씀이신 그분의 가르침을 굳게 잡아 계속 머물러 있으라. 왜냐하면 네 자신이 이것을 행함으로 듣는 자들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디모데 안, 우리 안에 주어진 말씀이 이루어내신다는 의미이다(202411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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