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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07
디모데전서 3:8-13
집사의 직무
성경에서 말씀하는 초대교회의 감독, 집사를 오늘날 교회의 직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감독을 목사나 장로로, 집사를 집사로 이해한다면 오늘날 서리집사와 안수집사 중에서는 당연히 안수집사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교단은 목사 위에 감독의 직을 두는 교단도 있다. 그러면 왜 권사에 대해서는 없는가? 초대교회에는 없었으나 교회 역사 속에서 필요에 의해 새롭게 세워진 직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나누도록 모든 성도에게 다양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직무라고 한다면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모임에서는 필요에 의해 직분이라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외에도 모임에서 필요에 의한 여러 직분자를 세울 수 있다면 직분 자체를 절대화하거나 거룩한 직이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매일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골 1:25)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을 세우는 일이다(엡 4:11-12).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8절). “이와 같이”라는 표현은 감독과 집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집사”란 ‘디아코노스’는 ‘종, 고용인,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식사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여기서 영어 ‘deacon’이라는 단어가 왔고 이를 ‘집사’로 번역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 6:1-6)
“구제”(1절)라고 번역된 말이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이다. 즉 ‘봉사의 일로 시중드는 일’에 빠졌다는 뜻이다. “접대”(2절)라는 말의 ‘트라페자’는 ‘상, 식탁, (식탁 위에 놓은) 음식, 잔치, 연회, (돈을 세기 위한) 계산인, 재정출납’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9:2에서는 성막의 진설병 “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출 25:23-30). 그리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3절)라고 하였을 때 “사람”은 ‘아네르’로 ‘남자’라는 뜻이고(2:8), “택하라”라는 말의 ‘에피스켑토마이’는 ‘돌보다, 택하다, 방문하다’라는 뜻이다(여기서 ‘감독’으로 번역되는 ‘에피스코페’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
즉 말씀의 씨를 가진 남자 “일곱”을 세웠다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일하심을 나타낸다(그러므로 본문은 일곱 집사를 세웠다는 말씀이 아니다). 단순히 집사로 세워 사도들을 보조하거나 재정 맡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절)라는 것인데 곧 ‘기도와 말씀으로 시중드는 일’이다. “힘쓰리라”라는 말의 ‘프로스카르테레오’란 ‘굳게 지키다, 충성하다, 굳게 계속하다’라는 뜻이다. 말씀이란 복음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기도란 그 분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것을 굳게 계속한다는 뜻이다.
구제의 대상은 과부들이었다. 문자적으로는 남편을 잃은 여자이지만 성경적으로는 율법 남편이 죽었기에 율법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남편이요 진짜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봉사, 섬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구제의 일에 누락되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 왕국의 공평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에 말씀의 씨를 가진 남자 일곱을 세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곧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도 교회 안에서 물리적인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로 풀어서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집사”라는 말의 ‘디아코노스’는 우리 성경에서 “하인”(요 2:5), “일꾼”(엡 3:7, 6:21),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롬 16:1),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 “하나님의 일꾼”(고후 6:4), “의의 일꾼”(고후 11:15), “그리스도의 일꾼”(골 1:7), “교회의 일꾼”(골 1:25),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딤전 4:6), “복음의 일꾼”(골 1:23), “하나님의 사역자”(롬 13:4), “임금의 사환”(마 22:13), “섬기는 자”(요 12:26)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결국 “집사”란 문자적으로는 식사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말하나 성경적으로 보자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잘 먹을 수 있도록 종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정중하고”는 ‘셈노스’인데 ‘세보마이’(경배하다, 숭배하다, 헌신하다, 예배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존귀한, 공경(숭배)할 만한, 존엄한, 거룩한’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경배를 한다는 의미이다.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의 ‘딜로고스’는 ‘디스’(두 번, 다시)와 ‘로고스’(말, 말씀)의 합성어로 ‘이중으로 말하는, 다른 말하는’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율법을 다시 사람의 계명과 교훈으로 말한다는 의미이다.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에서 “인박히지”의 ‘프로세코’는 ‘프로스’(~을 향해, ~의 곁에, 가까이에)와 ‘에코’(붙잡다, 소유하다)의 합성어로 ‘가까이 가져오다, 주의하다, 전념하다, ~을 마음에 돌리다)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많은 포도주에 전념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술을 가까이 가져와서 거기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룩이 들어간 말씀은 사람의 계명이고 교훈인데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의 ‘아이스크로케르데스’는 ‘부정한 이득을 좋아하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이라는 뜻이다. “더러운”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마 15:18-20)이며 곧 “육체의 일”이다(갈 5:19). 즉 율법의 행위로 쌓인 자기 의가 더러운 것이다. 율법을 지켜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탐욕을 지칭한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9절). “양심”이란 말의 ‘쉬네이데시스’는 ‘쉬네이도’(함께 보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의식, 양심, 성실함’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함께 보는 것이 양심이다. 그렇다면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함께 보는 것이라고 해보아야 죄악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깨끗한 양심”이란 8절에서 ‘더러운 이를 탐하는 것’과 대조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것으로 함께 생각하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비밀”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종교적 신념에 불과하다. 그래서 강한 신념으로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이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관리하거나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사람이 알 수 없는 비밀이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10절). “시험하여”라는 말의 ‘도키마조’는 ‘시험으로 증명한다’라는 뜻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의 ‘아넹클레토스’는 ‘비난할 것이 없는, 흠 없는’이라는 뜻이다. 오직 진리만 드러내는 일에 비난할 것이 없는 상태로 증명된다는 의미이다.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라는 표현을 이미 조직이 있다는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한다고 의역을 하였는데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섬기게 할 것이요, 봉사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이다. 즉 어떤 시험이든지 여러모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말하는 것으로 증명되어져 비난받을 일이 없다면 섬기게 하고 봉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이 말씀에 대해서는 좀 엇갈리는 견해가 있다. 남자 집사의 아내를 말한다는 견해도 있고, 여자 집사를 말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남자 집사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 집사도 이렇게 세워야 한다는 해석을 취한다. 8절에서 “정중하고”라고 번역한 ‘셈노스’를 여기서는 “정숙하고”라고 번역하였다. “모함”이라는 말의 ‘디아볼로스’는 ‘비방자, 마귀, 사탄, 대적자’라는 뜻이고, “절제하며”라는 말의 ‘네팔레오스’는 “절제하며”라고 번역하였는데 ‘술 취하지 않는, 절제하는, 정신 차리고 있는’이라는 뜻이다.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라는 ‘모든 일을 믿음 안에 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말씀을 잘 먹을 수 있도록 시중드는 일을 하는 자를 세웠다면 온 교회가 함께 받아들이고 그들과 동일하게 정숙하고, 즉 진리의 말씀을 잘 경배하고 십자가를 대적하는 사탄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늘 확인해야 하며, 절제하는, 즉 진리를 마음에 잘 품고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며, 모든 일을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 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함께 진리의 말씀을 품고 진리 안에 서 있는가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일은 어떤 직분자가 하는 것이 아닌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교회를 진리 가운데 든든히 세우시는 일을 하신다는 뜻이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12절). “잘 다스리는”이라는 말의 ‘프로이스테미’는 ‘앞에서 잘 인도한다’라는 뜻으로 앞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잘 인도한다는 의미이다(5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남편으로 여기는 자로서 먼저 남편이 되고 그 아내는 말씀의 씨를 받고 자녀를 낳는데 곧 여자가 될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남자가 나오게 된다. 이러한 남편과 아내, 자녀가 한 집을 이루는 것이니 곧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왜냐하면)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13절).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호티’(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다. “잘한 자들”이 ‘칼로스’이고 “아름다운”이라는 말도 ‘칼로스’인데 ‘선한, 아름다운’이라는 뜻이고, “지위”의 ‘바드모스’는 ‘계단, 문지방’이라는 뜻인데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것이다. “담력”이란 말의 ‘팔레시아’는 ‘개방, 밝히 드러냄, 신뢰, 확신, 대담함, 솔직’이라는 뜻이다.
이미 감독 직무를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집사 역시 오늘날 교회에 있는 어떤 특정한 부류의 직의 직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통해 감독을 목사로 둔갑시켜 성직으로 만들어 교인들과 구분된 좀 더 거룩한 위치에 있고, 집사는 목사를 도와 허드렛일을 하는 직분처럼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성직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영매의 자리로 잡아 양복 입은 무당이 되었고 직분은 계급이 되었다.
“집사”는 말씀의 시중을 드는 자로서 온 교회에 생명의 양식을 먹도록 십자가만 전하는 것이 선한 것이기에 선한 자리에 구분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는 의미이다. 결국 집사에 대한 말씀도 자격을 가진 자는 그 누구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교회요 성도로서 감독이며 집사이다(202411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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