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오전강론)

75. 요한계시록 19:11-16 흰말 위에 앉은 이

불편한 진리 2024. 5. 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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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75

요한계시록 19:11-16

흰말 위에 앉은 이

 

사도신경에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고백이 있다. 단순히 미래에 심판하러 오시면 그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서 언제나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 놓으신다. 목숨이 유지되고 있기에 산 자이고,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죽은 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선악의 나무는 아담과 하와만 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취한 것이고 그것이 죽은 상태라고 성경은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 죽음의 증거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 산 자가 오셨다는 뜻이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심으로 산 자이심을 증명하셨다. 죽음뿐인 이 땅에 하늘에서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는 상태가 죽음이고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합류되는 것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시는 것이 최종적인 심판으로 드러난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만 심판주의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다’라는 말이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본다는 표현은 요한 사도가 하늘의 환상을 볼 때마다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표현을 쓴 다음 하늘의 현상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늘이 열려 보게 되는 환상은 이 땅의 실체와 하늘의 상태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4:1에서 이미 하늘이 열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몸을 찢어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 양식을 먹는 상태로 만들었음을 의미한다(시 78:23-25, 히 10:19-20). “보좌 위에 앉으신 이”(4:2)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나타내고, “흰말 위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을 상징한다.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그리고 보라! 흰말과 그 위에 앉으신 이, 그는 믿음과 진리라고 불린다’라는 말이다. 짐승을 탄 음녀와 대조한 표현이다. “충신”은 ‘믿을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믿는, 충실한, 충성’이라는 뜻을 지닌 ‘피스토스’이고, “진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알레디노스’로 ‘진짜의, 실제의, 진실된, 참된, 정당한 신뢰할 수 있는’이라는 뜻이다.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3-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성된(피스토스) 증인”(1:5), “아멘이시요 충성되고(피스토스) 참된(알레디노스) 증인”(3:14), “거룩하고 진실하사(일레디노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3:7)라고 하였고,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거룩하고 참되신(알레디노스) 대주재여”(6:10),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알레디노스)”(15:3),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알레디노스) 의로우시도다”(16:7), “그의 심판은 참되고(알레디노스) 의로운지라”(19:2)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흰말 위에 앉으신 이를 하나님과 동일시 한 표현이다(21:5, 22:6).

구약에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아멘”을 붙였다. “진리(아멘)의 하나님”(사 65:16)이신 여호와께서 자기 언약대로 신실하게 진리로 완성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그리고 진리로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백마”라는 ‘흰말’은 정결하신 분의 승리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은 구약에서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는 말씀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적하고 핍박했던 용과 바다와 땅에서 나온 짐승, 그리고 그들의 추종 세력들, 거짓 선지자들을 반드시 심판하며 승리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래서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12절)라고 말씀한다. “그 눈은 불꽃 같고”라는 묘사는 ‘그 눈은 불의 화염 같다’라는 말인데 누구도 그분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라는 말의 헬라어 ‘디아데마’는 6:2에서 흰말을 탄 자가 쓴 월계관을 의미하는 “면류관”(헬, ‘스테파노스’)과는 다른 ‘왕관’을 의미한다. “많은”이라는 말의 헬라어 ‘폴뤼스’는 ‘많은, 큰’이라는 뜻이다. 짐승의 “열 왕관”(13:1)과 대조된 표현으로 절대 주권을 상징한다. 즉 싸워 심판하심으로 왕으로서 위대한 다스림을 행하시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은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으로 더욱 강조하였다. 그 이름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라는 말씀에서 분명한 것이었고 “임마누엘”(마 1:23)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분해 내어 함께 하시는 이름이다. 실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이다. 세상에 속한 이름이 아니기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참고 2:17, 3:12).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13절). 여기서 “뿌린”의 헬라어 ‘밥토’는 ‘담그다, 물들이다’라는 뜻으로 어느 한 부분만 피에 묻은 것이 아니라 옷 전체가 피에 흠뻑 적셔진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는 것은 구약에서 말씀한 것을 배경으로 한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사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3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사 63:2-3)

 

포도주를 만들 때 틀에 넣어서 짓밟는 비유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밟으면 입고 있던 옷이 붉게 물든다. 예수님께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아서 옷이 온통 피로 물든 것과 같이 심판하심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단함으로 심판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피에 적셔진 옷을 입었다는 의미는 죄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였던 죄악을 폭로하심과 동시에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왕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라고 하였는데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밝혔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3, 14)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천지 창조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이며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자기 행위로 말씀을 이루기 위해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살해하였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죄를 폭로하신 것이며 동시에 말씀으로 심판하신 것이다.

그래서 15절에서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15절)라고 말씀하였는데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사야서와 시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8-9)

 

메시아가 오시면 그분이 하실 일을 이렇게 예언한 것이다. “철장”이란 ‘철로 된 왕의 지팡이, 막대기’를 의미한다. “다스리며”라는 말의 ‘포이마이노’는 ‘목자로서 돌보다, 양을 치다, 통치하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철장과 같아서 질그릇 같이 다 깨어지나 자기 백성은 목자가 양을 치듯이 구해내신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드러내신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6절). “다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메로스’는 ‘넓적다리, 허벅지’를 의미하여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옷의 부분’에 이름을 쓴 것이 있다는 뜻이다. 흰말 위에 앉으신 분의 이름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17:3에서 음녀가 탄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 것과 대조된다. 그러기에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없다.

이스라엘이 예외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라면 철저히 심판하신다. 그 속에서 자기 교회를 남기신다. 단순히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에 의해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이 심판이며 구원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견주어 말씀 아닌 것이 드러나야 한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런데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절). 흰 말 위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하늘에 있는 군대”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12:41에 보면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 하늘의 군대는 죄에서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 그래서 그 군대가 입고 있는 옷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라고 말씀한 것이다.

8절에서 말씀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이 바로 이 세마포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홀로 십자가 죽음의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가 따르는 분은 오직 흰말을 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같은 흰말을 타고 있지만 입고 있는 옷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군대가 비견된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 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요 성도는 날마다 죽는 죽음으로 자기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드러날 뿐이다. 그것이 “그를 따르더라”라는 말씀의 의미이다(202405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75.1911-16 흰말 위에 앉은 이(2024050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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