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계시록(오전강론)

74. 요한계시록 19:6-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불편한 진리 2024. 4. 2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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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74

요한계시록 19:6-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

 

교회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하나님만이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요 성도 된 자에게서 나오는 “아멘 할렐루야”는 단순히 내가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 된 자기 죽음을 확인하는 찬송이다. 그러므로 찬송가 몇 곡을 박자, 음정에 맞추어서 아름답게 부르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 안에서 그분이 행하신 일로 인해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태를 확인하는 이것이 하늘의 찬송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늘 찬송의 완성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보여준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 “또 내가 들으니”라는 표현은 같은 계시의 내용을 장면의 전환으로 보여준다.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라고 하였는데 “많은 물소리”는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17:1)와는 대조된 표현으로 “큰 우렛소리”와 함께 예수님에 대한 묘사 때 쓰인 표현이다(1:15, 14:2). 즉 음녀가 가진 율법의 문자와 종교적 행위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덮어 완성된 상태를 나타낸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3-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영광, 능력에 의해 완성되었기에 허다한 무리와 하나 되었다. 하나 되었기에 대속의 은혜를 입은 허다한 무리와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의 소리를 낸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5절)라고 하였기에 보좌의 음성과 더불어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이 “할렐루야”로 찬송한다.

“(왜냐하면)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하였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호티’(왜냐하면)를 번역하지 않았다. 즉 한 소리로 하나의 진리 된 상태에서 “할렐루야”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된 이유, 그 근거를 밝혀준다. 이렇게 하나의 진리로 선포될 수 있는 이유는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전능”이란 말의 ‘판토크라토르’는 문자적으로 ‘만물을 지배하는 자, 전능자’라는 뜻이지만 성경에서는 언약의 말씀을 하신 분이라면 그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그 다스림 안에서 한 음성으로 찬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단순히 음녀 바벨론의 멸망 때문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좁은 의미에서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일들이 창세 전에 언약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한다.

그래서 하늘의 상황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영광 돌리는 모습으로 나타낸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왜냐하면)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7-8절). “우리”란 보좌의 어린 양과 하나 된 허다한 무리를 지칭하는데 한마디로 교회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구원에 대한 예언을 이렇게 전하였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왜냐하면)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라고 하니까 곧 임박하여 혼인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쉬운데 “이르렀고”라는 말의 헬라어 ‘엘덴’은 ‘엘코마이’의 과거 형이다. 즉 혼인의 때가 되었다는 미래의 뜻이 아니라 혼인이 이루어졌다는 완료형이다. 여기서 ‘호티’(왜냐하면)라는 접속사를 우리 성경에는 번역하지 않았는데 교회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보좌에 앉은 분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린 양의 혼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다. 언약의 완성을 나타내는데 구약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참고 사 25:6).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6-20)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라는 말씀을 어린 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고 하니까 우리가 신앙을 정결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말씀이 아니다. 아내가 자신을 준비한 것이 무엇인가? “세마포”(헬, ‘뷔시노스’)이다. “허락하셨으니”라는 말의 헬라어 ‘에도데’는 ‘디도미’(넘겨주다)의 과거 수동태이다. 즉 ‘세마포를 넘겨받았다’라는 뜻이다.

세마포는 구약에서 성막 휘장과 그 성막의 축소판과 같은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기본적인 재료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요 성도가 세마포를 입었다는 것은 성소, 곧 성전이 되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래서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런데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표현한 것과 상충되는 표현인가? 그렇지 않다.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니까 단순하고 쉽게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행위, 곧 성경을 읽는 것, 필사하는 것, 기도하고 구제, 전도와 선교하는 것,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주일 잘 지키는 것, 십일조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신앙 행위로 신부의 모습이 되도록 잘 갖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횡행한다.

이런 종교적 행위는 어린 양의 신부 된 증거물이라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우리의 의지와 열심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옳은 행실”이란 ‘디카이오마’는 ‘의로운 행위’라는 뜻인데 오직 “성도”(헬, ‘하기오스’), 즉 ‘거룩하게 된 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 죽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므로 어린 양의 신부 된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다. 자신의 행실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이다. 자기 행실로는 도무지 하나님 왕국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게 될 뿐만 아니라 오직 그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9절)라고 선언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이라는 표현에서 ‘칼레오’는 ‘부르다, 초대하다, 이름 짓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구경꾼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로 부르심을 받고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이다. 우리의 행실, 우리의 죄악과 관계없이 하늘의 잔치에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우리는 죄를 지어도 괜찮고 우리의 행실이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죄인의 행실이 우리에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의 피에 의해 깨끗함을 입어 신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들은’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이라’라는 말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말씀들’이 된 자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가 되었다. 따라서 말씀이 되는 것, 진리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 맺어지는 열매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는 바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10절).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예언의 영”(헬, ‘호 프뉴마 호 프로페테이아’)이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영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 15:26-27)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3-15)

 

여기서 “그가”는 9절에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라고 한 천사이다. 천사는 자신에게 예배하려는 것을 거부한다. 합당하지 않은 이유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해야 하는 것이며 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 성령에 의해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 온전한 예배이다. 어린 양의 신부 된 교회요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하나 되어질 때만 온전한 예배가 된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란 이런 의미이다(202404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계74.1906-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202404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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