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오후강론)

69. 창세기 25:19-26 이삭의 족보-여덟 번째 톨레도트

불편한 진리 2024. 3. 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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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69

창세기 25:19-26

이삭의 족보

- 여덟 번째 톨레도트 -

 

이스마엘의 톨레도트가 일반적인 민족의 번성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삭의 톨레도트’는 언약의 후손에 대한 계시이다. 앞에서 이스마엘에 대한 역사를 간단한 족보로 처리하고 여기서는 언약의 계보인 이삭의 후손에 대하여 언급하여 하나님께서 언약의 상속자 계열을 어떻게 이어가시는가를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번성이란 단순히 후손의 많아짐이 아니라 언약의 후손이 이어짐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19절).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한 후 곧장 이삭의 족보를 언급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것이었다. 아들을 주시는 일을 통해 언약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언약의 궁극적인 완성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이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19-20절). 이미 리브가의 출신이 어디며 누구의 딸인지 다 언급하였는데 여기서 새삼스럽게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라고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혈통적인 족보를 알려준다기보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과 사라가 같은 상태에서 부름을 받아 언약 안에 있게 된 것처럼 리브가도 언약을 위해 그렇게 아버지의 집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참고 24:4, 38, 4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라고 하였는데 26절에 의하면 60세에 아들을 얻는다. 결혼하고 20년이 지난 후였다. 이 상황이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한 후의 본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사망 이후의 사건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60세였다. 아브라함은 두 손자가 태어난 것을 보고 15년이나 더 살았다(40강 도표 참고).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삭의 생애에 대한 20년간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아내 리브가가 불임녀라는 것과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일, 우물로 인한 아비멜렉과의 다툼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일(20-21장)을 그대로 반복한 것 같은 사건을 기록하였다. 또한 이삭은 결코 가나안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 성경은 이삭이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상속자이지만 아들이 없다는 것을 먼저 언급한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1절). 이 말씀을 가지고 이삭과 같이 한나(삼상 2:1-11)와 같이 기도하면 아들을 얻는다는 문자적인 해석은 말씀을 왜곡한 것이다. 상속자 문제는 단순히 아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문제로 메시아의 길을 이루어 가는 계보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의 톨레도트에서는 후손들이 번성하였다고 기록한 반면 이삭과 리브가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불임녀를 이삭의 아내, 언약의 상속자로 선택하셔서 간구하게 만드셨나? 출애굽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7, 9-10)

 

이 말씀을 하시기 전 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4-25)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면 그대로 실행하시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로 하여금 부르짖도록 기다리셨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구원하셨다고 이해하면 구원은 우리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이런 이해는 말씀 전체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는 것은 자기 언약을 위해 일하신다는 의미를 나타내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부르짖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자기 언약에 의해 이루시는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이삭의 결혼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이 말하길 하나님의 사자가 앞서서 선택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임 여성인 줄 모르셨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임신하지 못하는 리브가를 선택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거나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리브가로 하여금 불임녀가 되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언약을 이루는 일에 사람의 생각과 힘이 개입되는 것을 차단하시기 위한 조치이다. 아들 낳는 역사는 결혼으로 당연히 생기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위해 일하심을 따라 후손이 주어지는 역사임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자녀가 없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단 한 번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언약의 자녀는 결코 자연적인 열매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는 한꺼번에 태어난 아들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가 되는지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2-23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약의 상속자를 한 아들만 주시면 되지 왜 둘씩이나 주셔서 혼란에 빠지게 만드실까?

이스마엘은 종의 자식이요, 이복형제로 이삭과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삭의 아들들은 외적인 조건의 차이가 없다. 한 어머니의 아들로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였다. 그리고 태어난 후 언약의 상속자가 결정된다면 외적으로 상속자를 정할 수 있다 하겠으나 이들은 이미 뱃속에 있을 때 정해짐으로 외적 조건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언약의 상속자 문제는 인간이 선악을 알기 전에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신약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이 말씀은 말라기 선지서를 인용한 것인데 하나님의 선택을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씀한다(말 1:2-3).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없다. 그렇게 하심은 궁극적으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롬 5:8, 8:32). 이것이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이다. 사람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선택이다.

그리고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큰 자”란 에서이고 “어린 자”(히, ‘차이르’)는 야곱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작은 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어떤 모습인지를 폭로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태중에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선택의 말씀을 하신 것은 앞으로 어떻게 일하실 것인가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은 자기 이익을 따라 행동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인간의 죄를 폭로하심으로 언약의 새로운 면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는 방식은 큰 자가 어린 자, 보잘것 없는 자를 섬기는 방식이다. 세상에서의 장자는 시간을 역사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먼저 태어났다는 것이 장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중에 태어났다고 해서 무조건 장자가 된다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 언약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사람의 이기적인 자기 사랑은 결코 언약을 이어갈 요소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언약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큰 자가 누구이며 작은 자가 누구인가를 세상에 증거하심으로 언약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세상은 언제나 누구나 다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원하는 큰 자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은 영웅을 원하고 큰 자가 세상을 호령하고 권력을 잡아 자기를 다스려 주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린 자로 이 땅에 오셔서 오히려 세상에서 큰 자로 여기는 자에게 희생당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가를 물었을 때 이렇게 답변하셨다.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2-5)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란 단순히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낮아짐을 말씀하신 것이다(빌 2:8). 천국에서 큰 자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섬기심으로 작은 자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양과 염소 비유’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을 작은 자와 동일시하셨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만이 작은 자가 되고 그가 천국에서 큰 자이다.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24-25절).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리브가가 아들을 낳게 되었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에 털이 많아 그 이름을 “에서”(히, ‘에사우’)라 하였는데 “붉고”라는 말의 ‘아드모니’는 ‘붉다’라는 뜻의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쌍둥이”의 히브리어 ‘타옴’은 ‘완성되다, 한 쌍이 되다, 이중으로 하다’라는 뜻의 ‘타암’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힘으로 언약을 이루기 위해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마엘은 종의 자식으로 율법을 보여주는 존재인 반면 이삭은 언약의 아들이다. 이 언약의 아들을 통해 복음이 온전히 성취되어 드러난다. 즉 율법 안에서 복음으로 완성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서와 야곱을 동시에 주신 이유는 야곱을 통해 궁극적인 언약의 아들이 오시면 그 안에서 하나로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26절). “발꿈치”(히, ‘아케브’)를 잡았다고 하였는데 ‘아카브’(발꿈치를 잡다, 음흉하게 공격하다, 교활하다, 속이다)에서 온 말이다. 27:36에서 에서가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아카브)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야곱”(히, ‘야아코브’)이란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찬탈자’라는 뜻이다.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라는 표현은 말씀의 결실이 “육십 배”(막 4:20)라고 한 것과 같이 아브라함 언약의 말씀이 이삭에게 결실을 맺고 있다는 의미이다(2024030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69.2519-26 이삭의 족보-여덟 번째 톨레도트(202403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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