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십계명(열 말씀) & 언약

언약의 열 말씀 강론 04_출애굽기 20:4-6 우상

불편한 진리 2023. 6. 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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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열 말씀 강론 04

출애굽기 20:4-6

우상

 

만약 우리가 이 말씀도 계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신명기 17:3-5에서 “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 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지키고 있는가?

또 출애굽기 22:18에 의하면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라고 하셨고 20절에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무당을 보거나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를 보면 일단 죽일 마음을 가지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언젠가 그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이 계명대로 다 지키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소위 말하는 두 번째 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4-5a)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도 이제까지 계명으로 받아들이며 이 말씀을 지키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다음 말씀을 자세히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5b-6절)라고 우상을 섬기는 자에 대한 처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해 은혜를 베풀 것을 말씀하신다.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고 섬기는 자들은 나를 미워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는데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는 우상을 섬겼는지 아닌지를 따져 보아야 하지 않는가? 그중에서 누군가 우상을 섬겼다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삼 사대까지 갚는다고 하셨으니까 적어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계명을 해석할 때 하나님께서 그다음에 주신 말씀에서 다 덮어진다고 이해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푼다고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내가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그다음에는 후손들이 잘못하더라도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니까 무조건 천국 간다는 뜻인가?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는 중에라도 어느 누가 또 우상을 섬긴다면 다시 삼사 대까지 죄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딜레마에 스스로 빠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교인이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저주를 끊고 복을 대대손손 이어 가도록 하기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면서 하늘의 상급을 쌓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 그 단적인 예가 오래전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라는 책이 나오자 많은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복음을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이런 사고방식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덕을 쌓아 다음 생애에도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특히 십계명으로 생각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3절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창 1:26, 5:1) 선악의 나무 취한 후 모든 사람은 아담의 형상을 따라 태어났다(창 5:3). 아담의 형상을 좇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며(롬 3:23) 누구나 다 하나님을 향해 마주 서 있는 자이다. 즉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다 자기를 위해 살며 자기 아닌 자를 다 원수로 생각하며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4절에 “너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기에 바울 사도는 우리의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를 위하는 탐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본문에서 그 답을 제시해 놓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질투하는 하나님”(5절)이라는 표현이다. “질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나 아닌 다른 상대를 좋아하여 시기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 우상을 이렇게 보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가?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자들은 이 말을 오해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니 쪼잔하여 신 같지도 않은 하나님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런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이 표현이 좀 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질투심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속으로만 담아 놓고 계시지 굳이 이렇게 표현하셔야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좋은 방향으로 이해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우상을 섬기는 것을 질투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나를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성경에 없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자기 아들에게만 있고 그 아들과 하나 된 교회요 성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히브리어로 ‘엘 칸나’라는 말인데 ‘칸나’는 ‘부러워하다, 시기하다, 열정이 있다, 열심을 내다’라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출애굽기 34:14, 신명기 4:24, 5:9, 6:15, 여호수아 24:19, 시편 79:5, 나훔 1:2 등에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였으나 같은 단어를 이사야 9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이 땅에 보내시는데 그 아들의 어깨에는 왕권이 주어져 있고 그 통치권으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그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이 곧 ‘엘 칸나’이다. 즉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 이 일을 결코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열심으로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결국 열 말씀에서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기 보다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께서 자기 열심으로 언약 백성들을 우상 숭배의 자리에 두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이다.

이는 열왕기하 19:31에서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라고 하셨고 이사야 37:32에서도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에스겔 39:25에서도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라고 말씀하셨다.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열심에 맡겨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열심으로 친히 언약을 이루신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포도나무로 비유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 포도나무를 키우는 농부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포도나무로 키우시는 농부의 수고로움 그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 담당하신다는 뜻이다. 서신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한다.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우리는 이제까지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많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되고 그다음은 하늘의 상급을 쌓기 위해 열심히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생활이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고 복음을 알게 된 신앙이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신 그 말씀 안에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성도는 아무 일한 것이 없이 믿음을 의로 인정받은 자이다. 그래서 “일을 아니할지라도”라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도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롬 3:22).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복이다(창 12:1-3).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삼사 대까지”(5절), 또는 “천 대까지”(6절)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부지런히 하늘의 상급을 쌓기 위해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천 대까지”라는 표현은 영원성을 표현한 말이고 “삼사 대까지”라는 말은 잠시 잠깐의 상태로 영원한 생명과 대조된 표현이다. 영원의 은혜는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노력으로 인하여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열심으로 이루신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언약 백성들을 속량하신 대속의 죽음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자는 그 은혜 안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4-6)

 

생명을 누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됨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주는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라고 하였다. 우리에게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튀어나오는데 그것을 억제하여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나의 의나 공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언약의 관점에서 표현자면 ‘너를 우상을 만들지 않게 하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섬기지 않게 할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다’라는 말씀이다(202306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언약의 열 말씀 강론 04_출2004-06 우상(202306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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