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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33
요한계시록 8:8-9
둘째 나팔
마태복음에 보면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라고 종말의 상태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적인 삶을 예수님은 종말의 상태라고 말씀하신다.
왜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상태로 표현하시는 것일까? 성경은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뜻도 아니다. 문제는 노아의 때 사람들이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다. 종말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적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모습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상을 끝내신다는 뜻이다. 피조 세계가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막 13:3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죄악 된 세상은 파기되고 하나님의 말씀만 남아야 한다. 창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셨던 모든 것이 완성되어 죄악 된 세상을 폐기 처분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 남기는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종말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언약으로 말씀하신 모든 비밀이 십자가의 성취로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세상이나 오늘날 세상은 언제나 동일하다. 세상은 늘 종말을 의식하지 않게 되어 있다. 죄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기에 종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늘 그렇게 자신들이 사는 대로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막연하게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을 생각한다는 것은 두려움이기 때문에 골치 아픈 문제를 일부러 끄집어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저 먹고 사는 다급한 문제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확장을 위해 사는 것에 불과하다. 종말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파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바로 애굽적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장자의 죽음으로 마지막 재앙을 내리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생각이나 생활상은 애굽의 확장에 불과하다. 애굽의 모든 사고방식과 거기서 나온 생활의 습관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철저히 심판을 행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해졌고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내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어린 양의 피를 의로 규정하셨기에 그 피를 바른 집만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다 죄악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것만 하나님의 언약 곧 말씀의 성취였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 안에 드러난 세계가 하나님 왕국이다. 기존의 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계를 오게 하신 것이 십자가 은혜에 의한 구원이다. 노아의 때에 심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드러난 말씀 안의 하나님 왕국 역시 세상의 심판을 통해 명백히 드러내시는 것이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8-9절). 불붙는 산이 바다에 던져진다고 하니까 화산 폭발로 이해하는데 본문은 자연재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화산 폭발만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며 자연재해가 종말의 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베론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죄악을 말씀하신 것에서 잘 드러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렘 51:25)
3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미 1:3-4)
바벨론을 산으로 상징하여 불탄 산이 될 것으로 말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며, 이스라엘을 산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이 임하시면 땅의 높은 곳, 곧 산들을 밟으시는 심판으로 녹아 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 21:21)
이 말씀과 연결하여 22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기에 오늘날 교회들은 이 말씀만 뚝 떼어서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다 응답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산을 옮기는 기도를 한 적이 있지 않는가? 예수님만 믿고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룬다고 하였지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문제로 치부한다. 이 말씀이 정말 그런 의미의 말씀인가? 이것이 우리가 문맥을 무시하고 우리 편한 대로 해석한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전 심판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 즉 성전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을 전제하고 하신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시온산’으로 표현할 때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사용되지만(참고 사 10:32, 18:7, 삼하 5:7, 왕하 19:31, 시 76:2 등) 일반적으로 “산”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의 자기 세력이나 권세를 나타내는 표현이다(참고 욥 9:5, 사 41:15, 40:4, 렘 51:25 등).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선언은 성전이나 유대인들의 운명과 관련된 말씀이다. 산이 바다에 던져진다면 “바다”는 이방이나 죄악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을 상징한다(참고 사 11:11, 23:11, 27:1, 60:5 등). 바다는 짐승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계 13:1).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물의 장사가 성행하고 돈 바꾸는 자들이 자리 차지하는 성전은 이미 죄의 권세에 매인 이방인들의 세상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뜻이다. 그래서 그 심판을 믿음이 한다는 것이다. 그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전에 심판이 가해진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권세를 상징하는 산을 바다, 즉 세상에 던져넣으심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구약에서 바벨론,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라는 말씀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어서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애굽을 심판하신 말씀 속에서 잘 드러난다.
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 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출 7:17, 20-21)
여기서 “죽고”라는 말의 헬라어 ‘아포드네스코’는 영적으로 죽었다는 ‘네크로스’와는 달리 ‘완전히 죽다, 죽음으로 완성하다’라는 뜻이다. 즉 심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나고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파기를 위한 창조였다.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또한 파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피조 세계 어떤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다 가운데 생명을 가진 피조물에게까지 철저하게 가해진다.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살겠다고 바다라는 세상을 근거로 하는 모든 행위들로 상징된다. 죄인들의 근거는 땅의 것이다. 땅의 것이란 곧 짐승의 근거지가 되는 바다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를 바다에 던져 넣으심으로 죄악 된 모든 것들을 죽음으로 철저히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파기하실 영역이라면 바다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전할 수 없고 그곳이 비록 하늘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견디어낼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파기하신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직은 “삼분의 일”이라고 하여 부분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정도의 능력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남겨두고 심판을 행하신다는 의미가 있다. 혹시 살아남은 부분에 속했다면 살아남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살아서 생명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엄청난 심판에서 내가 능력이 있어서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산이 바다에 빠지고 바다가 피가 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말씀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1-3)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만이 피난처이시기에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라고 고백한다. 도움 조력자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진리의 영이시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흔들리지 않는 언약의 성취, 실체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난 중에서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당당하게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를 향해 가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피난처 안에 거할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 그러므로 둘째 나팔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 역시 마지막 심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다 드러나 있고 오늘날도 이러한 심판은 계속 세상에 늘 드러나고 있다. 말씀을 아는 자는 그것을 날마다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갈 2:20). 그래서 세상은 종말에 노출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다(202304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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