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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약으로 보기 06_창세기 15:9-21 아브라함 언약

불편한 진리 2023. 4. 1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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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약으로 보기 06

창세기 15:9-21

아브라함 언약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4:11,16).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의미를 믿음의 모범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순종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훈련을 시켜 순종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훈련하여 믿음이 자라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크고 작고, 자라고 자라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훈련하여 자라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노아 언약 안에서 셈의 장막에 거하심으로 “셈의 하나님 여호와”(창 9:26-27)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신 결과였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좇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호수아서에서 이렇게 밝혀 준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수 24:2-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당시 부족의 신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역시 다른 신들을 섬긴 자였다는 것이다. 데라의 가족이 고향 땅을 떠나게 된 이유가 분명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느 9:7),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행 7:2).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왠지 데라는 하란에 머문다(창 11:3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라고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마침내 들어가게 만드셨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라고 약속을 확인하여주신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고 내려갔으니”(창 12:10)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 이끌려 들어온 땅이 기근으로 살 수 없는 상태였기에 아브라함은 살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살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바로를 속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창 12:17)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라를 보호하신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손을 주셔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창 13:6)라고 하였는데 물리적인 땅이 좁다는 말이 아니라 약속의 땅은 언약을 주실 자에게만 용납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라고 하셨다.

소돔에 살던 롯이 북쪽 네 족속의 연합군에게 잡혀가자 아브라함이 롯을 구해온 후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손과 땅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언약 의식을 행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9절)라고 하였는데 “년”이라는 햇수에 대한 표현은 없다. “삼”을 ‘세 번’ 반복 언급하여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10절). 하나님께서는 당시 계약 체결 방식을 차용하여 자기 언약을 나타내기로 하신 것이었다. 즉 상호 계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쪼갠 동물들 사이를 지나감으로 계약을 어기면 동물들과 같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고 계약은 깨어진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언약은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절)라고 하여 아브라함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책임지시겠다는 뜻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12절)라는 말씀이다. 즉 아브라함은 죽은 상태에 있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언급하자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라고 하셨다. 여기서 “몸”이라는 말 히브리어 ‘메에’란 생식기를 뜻한다. 사라는 불임녀였기에(창 11:30)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식기를 통해 상속자를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여 애굽 사람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었다(창 16:1-16).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버지는 높임 받으신다, 많은 무리의 아버지), “사라”(여주인, 왕비)이라는 이름을 주시며(창 17:5) 다시 할례 언약으로 확인하여 주신다.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이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하나님께서 “내 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언약임을 확실히 하셨다.

할례를 행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 “포피”(히, ‘바사르’)를 잘라 내는 것으로서 ‘육의 씨’(자손)가 아닌 ‘언약의 씨’(자손)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서 잘라 내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면서 그리고 그 후손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을 기억하고 기억해야만 했다. 할례를 행함으로 정작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었다.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5-6)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창 21:1-5). 여기서 “돌보셨고”라는 말의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라는 뜻이다.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다는 의미이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년 이맘때”를 직역하면 ‘생명의 때’라는 말이다. 이삭의 출생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드러나는 ‘생명’이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는 표현은 흔히 말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자식 이삭을 사랑하는지 하나님께서 몰라서 시험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시험”이란 증명한다는 의미이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증명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자를 부르시고 이끌어 생명의 아들을 주시는 언약을 확증하고 증명하신다는 것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그래서 그곳이 후에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가 된다. 즉 성전이신 분이 이 땅에 생명을 드러내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땅”, “씨”(후손), “복”에 대한 언약은 한 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언약으로 드러내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모리아 산까지 이끌어 오셨다. 이런 점에서 “씨”(히, ‘제라’)는 언제나 단수로 표현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지향하고 있었고 “땅”에 대한 약속도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날마다 그분의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각기 다른 내용의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약속 성취를 지향하도록 주어진 언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약에서 언약의 성취를 이렇게 밝혀 준다.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7-9)

 

우리 성경에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너는 복이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복”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행 3:25-26). 그래서 신약에서는 더 이상 복을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고 누리는 것이나 물질적인 소유로 말씀하지 않는다. “신령한 복, 후사, 기업”(유업) 등의 표현은 아브라함 언약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을 말씀한 것이다(참고 히 9:15, 롬 4:13, 엡 1:3, 5:5, 행 20:32, 벧전 1:3-4, 3:9 등).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행 13:26-27)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출발하지 않았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지시고 자기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 내시는 ‘내 언약’이고 ‘영원한 언약’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 안에서 생명으로 성취된 자들이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202304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성경,언약으로 보기06_창1509-21 아브라함 언약(202304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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