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이적 16_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치심
마태복음 15:21-28
네 소원대로 되리라
가나안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을 고치신 이적은 마가복음 7:24-30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밝힌다. 또한 마태의 기록에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마가의 본문에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고만 언급한다. 마가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고치심으로 귀신이 나간 것으로 표현하나 마태의 본문에는 귀신 들린 것으로 표현하나 결론에서는 귀신이 나갔다는 표현은 없고 그저 나아 고침을 받은 것으로 기록한다. 이런 차이점들은 일차 독자의 대상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고 우리는 마가복음의 본문도 참고하면서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21절)라고 하였는데 “들어가시니”(헬, ‘아나코레오’)라는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물러나시니’라는 말이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은 동일하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장로들의 전통, 즉 정결 예식을 가지고 공격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더러운 땅으로 여기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신 것이다. 아니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이방 땅으로 밀려나신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밀려나신 것이라기보다 두로와 시돈 지방, 가나안 여자를 만나 그의 딸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을 밀쳐낸 유대인들에 비해 예수님을 맞이하여 이방인 여자의 모습을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갈릴리 서북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무역 도시였다. 이사야 23장에서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볼 때 부를 축척함으로 교만하여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는 모습이었. 이러한 이방 지역에 예수님께서 가시니 가나안 여자가 나와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셔서 가나안 여자를 만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심판의 도시 두로와 시돈에 가신 것이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22절). 마태는 “가나안 여자 하나”라고 밝히고 있지만 마가복음 7:26에서는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라고 하였다. 헬라 문화권의 수리아 페니키아 지역의 이방 여자이다. 그러나 마태가 “가나안 여자”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진멸의 대상이 가나안 족속이었기에 그것을 염두에 둔 의도적 표현이다. 즉 이스라엘에 의해 진멸의 대상이 되었던 적대적인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이방 여자가 예수님을 향해 “주 다윗의 자손”(22절)이라고 소리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부를 때 세 번이나 “주”(22,25,27절)라고 불렀다. 가나안 여자의 이러한 선언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시며 곧 자신의 주님이 되신다는 고백이었다. “소리 질러”라는 말의 헬라어 표현은 계속해서 소리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23절)라고 말씀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든지 시끄럽게 하는 여자를 돌려 보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말씀드렸다고 밝힘으로 이스라엘의 적대적인 가나안 이방 여자의 고백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있다.
가나안 여자의 계속적인 소리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무시하고 계셨다. 이렇게 매정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당황스럽다. 그뿐 아니라 과거 예수님은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적이 있다(마 8:5-13). 그렇다면 계속해서 요구하는 가나안 여자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그러나 가나안 여자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25절)라고 하자 예수님은 다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절)라고 하셨다. 그러자 이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라고 하였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란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어 정결하게 하지만 식사를 할 때 빵을 일부 뜯어 손을 한번 더 깨끗하게 한 후 그것을 상아래 던지면 개들이 와서 먹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 성경에 ‘개’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퀴나리온’(작은 개, 강아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욕으로 쓰이는 그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이렇게 표현하신 것은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와 돼지에 대하여 진리와 연관된 표현으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방인들과 같은 개와 외식하는 자들과 같은 돼지의 특징이 거룩한 것과 진주라는 하늘의 진리를 발로 밟아 땅의 것과 섞고 나누어 산산조각을 내 버리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진리를 전해준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대하고 계신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누구를 의미할까?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잃어버린 양으로 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잃어버린 양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를 찾아가셨으니 이 여자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것처럼 대하셔서 이 여자의 믿음을 드러내시기 원하셨다.
가나안 여자, 마가의 표현대로 하자면 우수한 헬라 문화권의 여자가는 로마의 식민 지배하에 있는 하찮은 갈릴리 마을의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면서 철저히 자신을 개로 여겼다. 이 여자가 자신을 개로 인정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였다는 의미이다. 자신을 개로 여기는 이 여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라고 하셨고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네 믿음이 크다”라고 하셨는데 이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믿음이 크다 작다’ 혹은 ‘믿음이 적다 많다’라는 양적 개념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믿음이 작다 혹은 적다는 표현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고 믿음이 크다 혹은 많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표현은 가나안 여자가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믿음이다. 믿음은 죄인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이란 내 쪽에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주어진 것을 말한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기존의 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로 씻어 자신을 정결하게 함으로 영생을 누리려고 하지 결코 믿음과는 상관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영생을 취하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결코 이런 것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믿음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 가셔서 이방 여자를 통해 드러내고 계신다. 그래서 마태는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절)라고 하였지만 마가는 의도적으로 “더러운 귀신 들린”(막 7:25)이라고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대해 고발한다. 더러움 속에 있는 자를 믿음으로 건져내시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면 이 여자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 여자는 딸이 귀신 들렸는데 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나?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자신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상태라는 뜻이다(마 9:36). 자신의 딸이 귀신이 들린 것은 목자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을 딸과 동일시 하고 있었다. 즉 자신이 흉악하게 귀신 들린 존재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귀신 들린 상태임을 아는 것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에게 하늘의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의 현상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마가의 기록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 말”이란 ‘말씀’(로고스)이라는 뜻으로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고백한 말씀이다. 마가는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을 마태는 ‘믿음’으로 바꿔서 표현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네 믿음”이란 ‘네게 주어진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28절)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여자가 자신을 개로 알고 고백하는 믿음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의 딸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이 가나안 여자에게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으로 주어졌기에 이 여자야 말로 이제는 개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양들로 묘사한다(렘 50:6, 겔 34:1-16, 사 53:6). 이제 무조건 이스라엘 민족이요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이 주어져 자신을 개로 알고 인정하는 자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4-17)
예수님께서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을 인도하여 그들의 목자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목숨을 버릴 것을 말씀하셨다. 결국 예수님은 이방인 가나안 여자를 찾아가심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개로 인정하게 만드시고 이러한 자가 바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다. 또한 자신을 개로 알고 인정하는 이런 양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이 이적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이 이적 역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표적이다. 믿음이란 자신을 개로 알고 인정하는 모습이며 불쌍히 여기 주시기를 구하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내어주신다. 본문 26절에서 말씀하는 “자녀의 떡”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가나안 여자가 끈질지게 예수님을 찾아 따르며 소리쳐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낸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 여자에게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주어진 그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원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소원을 이룬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것은 언제나 자기 언약이다. 그 언약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이 고침을 받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란 더러운 영에서 놓임을 받아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 되는 것이다. 물로 씻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되는 문제, 즉 이방인이요 귀신 들린 딸을 둔 불쌍한 여자로서 가장 존재가치가 없는 상태에 있는 자에게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말씀에 의한 믿음의 방식이다(2022060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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