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버스 정류장
독일에는 버스를 탈 수 없는 정류장이 있다고 합니다. 요양원 및 치매 시설 앞에 노인들을 위한 이른 바 ‘가짜 버스 정류장’입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노인들이 시설을 뛰쳐나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노인들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에 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시설을 나오는데 막상 나오면 뛰쳐나온 이유를 잊어버리고 길까지 잃어버립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 노인요양시설은 한 때 이런 노인들의 실종 때문에 고민에 쌓였습니다. 시설 측은 버스 운영회사와 협의해 노선에 없는 ‘가짜 버스 정류장’ 만드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시설을 탈출한 노인들은 본능적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특성을 이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눈 앞에 있는 가짜 버스 정류장에 앉은 노인들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잠시 후 자신이 왜 이곳에 앉아 있는지조차 잊어버리는데요 노인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직원이 다가가 “버스가 늦어지고 있는데 커피 한 잔하는게 어떠세요?”라고 권유하면 결국 노인들은 안전하게 시설로 돌아가게 됩니다. 꼭 필요한 이 정류장은 비록 버스가 오지 않는 가짜 정류장이라고 할지라도 잠깐이나마 ‘가족’,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노인들의 꿈과 희망을 주는 또 다른 공간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이 잠시나마 노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일지 모르지만 복음 안에서 보자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실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 죄인들의 처참한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치매로 인해 본능적으로 가족과 집에 돌아 가고자 하는 마음과 같이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세상에서 좋았고 행복했던 흐릿한 기억이 전부인 것인양 꿈꾸며 계속적으로 세상에서 허우적대는 이 땅이 가짜 정류장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실제 목표를 잊어버리고 그저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행복이 천국인 것인양 다시 또 이 땅의 원리와 방식대로 미친 듯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치매 걸린 노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권세에 매여 죄 가운데서 죄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도 인간들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떠나야 할 정류장에서 서성이는 치매 걸린 자입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정류장에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거기에서 나의 집을 찾기도 하고 또 거기에 집을 짓습니다. 살아 있다고 하나 죽은 존재 그런 나가 바로 치매 걸린 자로 가짜 버스 정류장으로 늘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 가짜 버스 정류장과 같은 우리의 장막 집이 날마다 무너져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집이 무너져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전,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1-2)
육의 장막을 무너뜨리면 하늘의 영원한 집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의 영원한 집이 된 자는 육의 장막을 날마다 무너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상속 받는 자라고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던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18)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가는 날 동안 날마다 주님의 몸된 교회임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목표, 꿈을 이루기 위해 가짜 버스 정류장과 같은 세상으로 돌아갈지라도 주께서 다시 십자가로 또 되돌리시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고난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위에 것에 속한 존재임을 십자가로 늘 확인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감히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배터리가 떨어지면 다시 충전하듯이 기도원에 가서 자주 충전해야 하는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부흥회를 한 번씩 열어서 신앙을 북돋우어야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Q.T를 하고 말씀을 적용할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능력과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이루는 성취감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하면 좋은 신앙이 된다는 것이 없습니다. 시간에 얽매여서 어떤 시간에 맞추어서 끊고 맺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1년에 두어 번 감사절기를 지켜 감사하는 마음을 특별히 돈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뒷방에 병든 늙은이로 계시는 것처럼 명절에나 한 번씩 가서 뵐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취미로 이야기하는 동호회 회장이거나 사람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계모임이나 종친회의 어른과 같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집에 아주 가끔씩 심방을 오셔야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늘 함께 주님과 더불어 거하며 화목을 누리고 있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싫증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가끔 은혜 받았다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요?”. “얼마나 열심을 내면 될까요?”, 또는 “얼마를 바칠까요?”라는 식으로 자기 신앙의 역량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치매 걸린 자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모든 모습들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홀로 십자가를 지셨고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큰 소리쳤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잡혀 가셨을 때에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팔았던 자가 제자들 중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인간의 못남과 실수, 실패의 연속이 우리의 죄악된 본 모습임을 철저히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밋밋하고 아무 재미가 없는 것 같아도 시간을 초월한 상태로 그냥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역사(시간)를 끝내실 일만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과정 중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있다면 필요에 의해 적절하게 수행해 나가면 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지는 삶입니다. 역사를 마무리하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에 의해 날마다 내가 해체되어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20200601/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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