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
영국의 문학가 엘리어트(T.S.Eliot)가 5부작으로 쓴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 1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뒤인 1922년에 쓴 시였기에 당시 전쟁으로 황폐화된 주변 환경과 피폐해진 인간들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시의 첫 대목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왜 잔인한 달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 신화에서 ‘쿠마에’ 신녀(시빌)는 태양신 아폴론의 여사제로 앞날을 점치는 힘을 지녔었다. 아폴론이 그녀를 사랑하여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손 안에 한 줌의 먼지만큼 많은 햇수의 수명을 원했고 아폴론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무녀는 젊음을 함께 달라는 것을 잊었기에 시간이 가고 해가 갈수록 몸은 계속 늙고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몸이 점점 작아져 작은 조롱 속에 들어갈 만큼 되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라고 놀리는 물음에 무녀가 하는 고백은 “죽고 싶어”라는 것이었다.
시빌은 해가 바뀌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가장 괴로운 때였다. 만물이 소생하여 생기를 얻는데 그것과 대조하여 자신은 점점 더 늙어 초라하게 쪼그라들면서도 죽을 수가 없었기에 4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었다. 엘리어트는 이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하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엘리어트의 시를 인용하면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무엇 때문에 잔인한 달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리어트가 말한 것과는 관계없이 이 싯귀를 인용하여 자기 입장에서 4월을 잔인한 달로 여긴다. 누구에겐 4.16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 잃은 죽음과 슬픔을 겪은 이들에게 무엇인가 해결되지 않은 잔인한 달이고 누구에게는 4.19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잔인한 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병실 창가에서 피어나는 파릇파릇한 새순과 화사한 꽃을 보며 상대적인 잔인함을 느끼는 상태일 수 있다. 더구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에게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한 때 보험회사에서 영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2월은 영업 일수가 가장 짧은 달이고 대학 등록금을 준비하는 시기였기에 가정마다 목돈이 필요한 때에 보험가입을 꺼리는 달로 알려져 있다. 2월에 일한 결과로 3월에 보수를 받아 4월을 생활해야하니 영업을 하는 설계사들에게 4월은 경제적으로 힘든 참 잔인한 달로 여겼다.
우리 다 개인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각자가 처한 형편에서 잔인함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잔인함은 많을 것이다. 그것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의 권세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사망 가운데 있고 거기서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진짜 잔인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4월에 기독교는 부활절이 있기 때문에 잔인한 달만은 아니라 희망의 달로 여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소위 말하는 ‘부활신앙’이라는 자기 최면으로 믿음을 나타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고난주간이라는 기간에 육체적인 고통으로 최대한 예수님의 고난과 일치시켜야만 한다.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로 말이다. 본심은 먼 미래 예수님의 재림 때에 나도 부활해야 한다는 희망을 가진 자기 존재감 확인이라고 한다면 심한 말일까?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 많은 교인들은 부활을 단순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건을 기념하여 자신의 부활을 이루어 내고자 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야 할 사건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은 사건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말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마르다의 이 고백이 오늘날 대부분 교인들의 고백과 같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부활과 생명을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다. 부활이 곧 생명의 상태이다. 그래서 부활을 소생이나 환생, 재생이라는 세상적 개념으로 풀어가려고 하였던 사두개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 것은 모든 인간들은 다 죽은 존재이고 하나님만 생명이라는 뜻이다. 율법을 지켜 자신의 행위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 아니 모든 인간들은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기에 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고 예수님께서 폭로하셨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기에 죽은 자는 살려내어서 살아 있는 자들과 상대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만들어내신 부활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부활이며 생명의 세계를 이 땅에 임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왕국이다. 그렇다면 그 왕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어설픈 자기 최면과 같은 부활신앙으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참여된다는 것은 십자가 죽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것을 내 믿음으로 이루어낸다는 것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3-5)
바울 사도의 선언대로 주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주와 함께 살아나야 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죽고 살아난 자가 주님의 몸된 교회이며 성도이다. 성도에게는 죽음이 있기에 부활이라는 생명을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기에 성경은 선물이라고 명명하고 있다(엡 2:8, 롬 5:17). 여기에 인간의 믿음이 낄 자리는 털끝만큼도 없다(롬 1:17). 예수님의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갈 2:20).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자격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겨주신 은혜를 입은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에게는 이 땅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4월만 아니라 일년 열두 달 내내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잔인한 달일지라도 그것이 단순한 황무지(광야)가 될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 부활의 세계가 주어졌고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20200427/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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