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24
십자가 정신
오늘날 많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십자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기독교를 상징하는 장식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임에서 어떤 중대한 결정에서 누가 앞장서서 책임을 질 것인가를 말할 때 흔히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라고 한다. 이 때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세상 말로 하자면 ‘총대를 멘다’는 뜻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면서도 십자가는 어둡고 암울한 것이기에 십자가를 계속 말하기보다는 십자가 이후의 사건인 부활, 즉 다시 살아나는 밝고 즐거우며 희망적인 것을 더 많이 생각하고 말해야 우리의 신앙이 한층 더 성숙해 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십자가’라는 의미가 그 정도일까? 어떤 일에 책임을 지고 선두로 나선다는 의미일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선두로서 책임을 지신다는 뜻이었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두로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인가?
또한 십자가는 어둡고 암울한 것이며 부활은 밝고 희망적인 것일까?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어둡고 절망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밝고 희망적이 될 수도 있는가?
우리는 이런 생각들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자가는 결코 그런 저급한 차원의 의미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4절)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것에 있다. 이 물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답변을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게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라고 하신 후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셨다(21절).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셔서 삼일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하자 예수님은 무서울 정도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하셨다.
조금 전에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복 있는 자’라고 선언하셨는데 이제는 ‘사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복 있는 자와 사탄의 구분은 무엇으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라는 뜻이다. 즉 구약에 수 많은 왕들, 제사장들, 선지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세운 메시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분은 오직 한 분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선언하셨다.
그것은 이미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선언하신 것이었고 그 선언이 있었을 때 성령이 임하며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4:17)라는 말씀이 오직 예수님만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분이라는 증거였다.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바로 “내 교회”라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자들이 교회이며, 복 있는 자들이다.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며 십자가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일이 바로 “사람의 일”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의 일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예수님 앞서서 십자가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예수님 같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사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에 보면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먼저 온 자”라는 말은 ‘예수님을 앞서 가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베드로(제자)는 예수님을 앞 세우고 그 뒤에서 따라가는 자여야 하고, 교회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사형 형틀이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고난을 당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어떤 일에 책임자로 혹은 선두로 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형수로서 한 마디로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31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1-34)
31절에서 “시체들”(소마)을 복수로 쓰고 있지만 “십자가”(스타우로스)는 분명 단수로 쓰고 있다. 또한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는데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이라고 한 것을 보면 순서가 로마군병이 세 개의 십자가를 왔다갔다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을 돌며 다리를 꺾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큰 기둥과 같은 나무에 예수님과 두 강도를 매달았다는 의미가 된다.
‘십자가’라는 말의 헬라어 ‘스타우로스’는 ‘(위로 향한) 막대기’, ‘기둥’이라는 말인데 ‘히스테미’(세우다, 고정하다)에서 온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기둥으로 세우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고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로서, 언약의 당사자로서 새 언약으로 온전히 성취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고 하셨고(참고 딤전 2:6),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라고 선언하였다.
신명기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라는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내려진 사형 선고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라고 선언하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찔림, 상함, 징계, 채찍 맞음 등 고난에 대한 일련의 과정과 십자가 죽음은 언약의 저주와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하였었다(사 53:4-6).
그렇다면 이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셨으니 우리에게 그 길을 따라 오라고 하신 말씀인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언약 백성들과 함께 죽으신 죽음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믿음으로 이루신 일이라고 언급하였다(롬 3:21-24). 그래서 죄인의 상태를 철저히 부정당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게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에 함께 연합되어 죽은 자라고 선언한다.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십자가는 사형형틀로써 수치이며 저주의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그 십자가는 단순히 수치나 저주로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하였고 그에게 자랑은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에 날마다 죽는 자신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요한계시록 11:8에 보면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 11:8)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신 곳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즉 성도는 소돔과 애굽,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던져져 있기에 날마다 십자가 정신으로 살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고 하는 ‘생존의 나’가 철저히 부정당하며 십자가에 죽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생명의 나’로 살아지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127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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