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경험과 하나님의 말씀
<대장간출판사에서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예수사회 53호에 기고하였던 글입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보기 때문에 다 지키려고 하니까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많은 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신앙을 방법론으로 추구한다. 예컨대, 기도응답을 받는 비결, 고난에 대처하는 방법, 낙심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방법 등등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찾는 것들이다. 요즘 기독교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이 주로 이런 것이라는 의미는 그만큼 많은 교인들이 방법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정당하냐 하지 않으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에 대부분은 이런 모습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신앙의 좋은 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꺼풀만 걷어서 내면을 본다면 그것은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의 경험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어떤 비결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경험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특별하게 성숙되게 한다든지 혹은 교회생활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 특별한 방법은 없다.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11:36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라는 말씀이나,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혹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의 종결을 이루신다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물의 시작과 종결을 이루는 모든 과정까지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즉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유지시키시며 그 믿음을 영생으로 온전히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마가복음 9:14 이하에 보면 인간의 경험과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상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변화산 사건이다. 예수님은 따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모세,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 사실을 본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 거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 거부하셨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산 아래로 내려 오셨을 때 산 아래에서는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는 제자들에게 고쳐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하였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시고는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고쳐주셨다. 제자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우리들은 할 수 없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구나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실패했구나, 기도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구나! 다음부터는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기도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되면 문제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기도하면 뭐든지 다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9:19에 보면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하셨고, 23절에도 보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능력을 내게로 끌어와서 내가 무슨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큰 능력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무엇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대부분이다. 결국 내 욕심을 이루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 같은 말이지만 믿음이란 나의 무능력을 말한다. 내가 할 수 없고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내 쪽에서 발휘되는 능력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는 것이다. 즉 나는 무능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와서 이 땅에서 쓸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의 능력을 내게로 끌어오는 도구나 수단이 결코 아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도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에 의해서 나오는 행위이다.
제자들은 과거에 귀신들을 쫓아낸 경험이 있었다(눅 10:19). 인간적인 경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또 다른 류(類)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단정하시는 것이다(막 9:19). 믿음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고 믿음이 있는 하늘의 세계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가능한 것이지 사람의 경험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마가복음 8:31에 보니까 예수님은 변화산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 이후에 9:31에서도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두 번째 말씀하셨다. 이러한 문맥으로 볼 때에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란 바로 ‘십자가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능력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이라고 하는 방법론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즉 예수님 자신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모르고 그 길을 따르는 삶이 없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일 자체는 생명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생명과 관계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인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일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증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와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질병을 고치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전제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주입 받거나 빌려와서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이 땅에서는 죽어도 좋다는 삶이어야 한다. 성도의 소원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서 욕심을 이루는 소원을 챙기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한가? ‘나는 교역자, 장로, 권사, 집사, 교사의 직분을 가지고 일 한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내 경험상으로 볼 때에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 맞아!’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인가? 사실 오늘날 교회를 이끌고 있는 주장은 대부분이 이러한 것들이다. 그래서 경험이 말씀을 앞서고 있다. 오직 교회를 부흥시킨 경험만이 목회자의 유일한 희망이다. 누가 교회를 몇 년 만에 몇 천 명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는 소문이 나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의 경험을 듣고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한다. 한 마디로 자신도 큰 교회로 만들고 자기 이름을 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험이 다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이 주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경험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 경험을 의지하는 그것이 나의 죄성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끝없이 말씀을 무시하게 되어 있다. 주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라면 오직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교회 성장, 내 신앙을 성숙시키는 비결, 기도를 잘하고 응답 받을 수 있는 비결 등 방법론을 추구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 이름을 내고자 하는 욕심일 뿐이다. 신앙에 방법론은 없다. 신앙의 방법론에만 의지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께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어 그 능력을 끌어오려고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십자가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오늘도 우리는 내 경험을 앞세워 십자가를 모독하는 모습으로 살지는 않는가? 진정한 성도는 오직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경험을 의지하고자 하는 욕심을 날마다 무너뜨리고 늘 말씀 앞에 엎드리는 삶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경험을 의지하고 경험을 중시하는 정신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말씀에 복종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에 의해 죽어지는 은혜이다(2007.7.1 /김영대http://blog.daum.net/revea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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