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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라는 직업병

불편한 진리 2015. 2. 23. 19:51

목사라는 직업병

 

요즘 담임목사 부자 세습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떠들썩하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로 비화되는 것은 목사를 하나의 직업으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가타부타는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본다면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2)는 말씀에 따라 담임목사를 누구를 세우느냐에 관심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몸을 세우고 있는가 하는 차원으로 교회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한국 교회는 목사들이 직업의식으로 심각한 직업병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나 자신도 이러한 직업병에 걸려 있으면서 스스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존재로 자신을 구별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먼저 나 자신을 철저히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한다.

 

1.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누구에게든지 설교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가르치는 투로 말한다.

 

목사에게서는 목사 냄새가 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즉 습관화되었고 직업적이라는 말이다. 으레 목사는 늘 설교를 하고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목사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직업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복음을 제대로 선포할 수 있는 자에게 자리를 당장 양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란 목사가 주인 노릇을 하고 교인들은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 목사의 의도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일서 2:27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 것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이란 성령이 성도 안에 내주하신다는 뜻이다(고후 1:21,22).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늘 우리로 하여금 주 안에 거하도록 하신다. 목사도 이런 점에서 같은 성령을 받은 자를 통해 배우고 함께 주님을 바라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2.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교인들에게 가르칠 소재로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떤 모임이나 세미나에 참여하여 조금 색다른(?) 소리를 들으면 곧장 기록을 하거나 머리 속에 기억을 시켜야 한다. 교인들에게 말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설교 할 때에나 성경공부 할 때에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목회 자료를 찾는 것에 급급하고 있다. 늘 자료에 굶주려 있다. 가르치기 위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것을 가지고 사명이라고 혼돈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주님은 목사나 교인을 구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16:24). 목사로서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없다면 수많은 지식과 자료는 교인들에게 해를 입히는 공해에 불과하다.

 

3. 목사에게는 특별한 권위가 있고 교인들은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자로 차별이 없다(3:22). 그런데도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 취급하면서 목사에게 순종하라고 강요하며, 심지어는 주님을 섬기는 것은 곧 목사를 섬기는 것이라고까지 엄포를 놓고 협박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급기야는 교회가 성장하려면 전도를 해야 하는데 전도란 불신자들에게 목사를 자랑하는 것이라고까지 거짓을 유포하고 있다.

목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그 입에 말씀을 주었다고 해서 목사에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에게는 권위가 없다. 다만 말씀의 권위가 있을 뿐이다.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존재로 부름 받았다. 혹시 누가 목사가 전하는 설교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말씀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력이 있기 때문이다(4:12).

 

4. 담임목사는 평신도, 전도사, 강도사, 심지어 부목사와도 엄연히 구분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당회장이라는 말을 주로 쓰나보다. 교인들과 그리고 부목사와 철저히 구분하여 다른 격의 존재로 자신을 부각시킨다. 자신을 부각시키려고 하니 자연히 교인들과 자신을 구분해야 하고 또한 부교역자나, 부목사를 무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로교회에서 당회란 목사와 장로가 교회의 일을 의논하는 회의를 말한다. 그 당회가 열린 상태에서 행정상으로 의장을 지칭하는 것이 당회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총회장이든 노회장이든 당회장이든 1년 내내 그 명칭을 즐겨 사용한다.

하나님은 어떤 직분이나 직책으로 상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언약 백성, 성도와 상대하신다. 물론 이 때의 언약 백성, 성도라는 말도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은 주님의 몸과 상대하시지 그 몸의 직분과 상대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12:5, 참고 고전 12:12-27).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4:4)라고 했다. 여기에 담임목사 혹은 당회장이라는 직책이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5. 설교할 때나 기도할 때만 되면 목소리가 달라진다.

 

소위 말하는 거룩한(?) 음성이다. 베이스음을 넣어서 마치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보통 목소리는 왜 경망스럽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특별히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어야 하는가?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고 '할렐루야!'를 남발하면서 성경책을 심장 가까이 들고 다니며 겸손한 척 하는 것이 목사다운 모습인가? 목사는 목사다워야 한다는 말이 이러한 모습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거룩이란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 자신만이 거룩이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고 했다. 우리의 행동이나 말을 조심하는 것으로 거룩하게 되거나 거룩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주님 안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거룩이다. 목사는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모습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통해 주님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자이다.

 

6. 모든 일을 교회의 유익과 연관지어서 생각한다.

 

그야말로 교회를 위한 염려가 하늘을 찌를 듯 한다. 이렇게 된다면 이것은 심각한 목사의 직업병이다. 교회란 주님의 몸이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말은 그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1:22,23, 1:18). 그런데 왜 목회자가 교회에 대하여 걱정하고 온갖 일을 혼자 처리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흔히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성도를 통해 일하신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목사로 주님 앞에 서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성령을 속였다는 죄목이다. 사도들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 지금도 성령님을 속이는 자를 그렇게 처리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원리와 다스림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이 원리, 이 원칙을 믿는 자가 성도요 주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10)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가 주님의 종의 모습이 아닐까? 목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뿐이다.

 

7. 자신이 양떼(교인)들을 지키며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란 목사가 교인들을 영적으로 장악해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이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과 공로에 의해 교인들이 많아지고 그 중에서 구원받는 자들이 많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오직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돈이 없으면 교회 일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교인이 있어야 하고 또 교인들은 부지런히 일해서 교회에 헌금하여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풍부한 재정을 가지고 예배당을 크게 짓고 구제하며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목회의 성공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에게 늘 이런 물음이 있어야 한다. ‘혹시 나는 목사로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사로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목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는 아니다. 목사의 욕심이 개입되는 목회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목회하고 계시고 나는 그분의 종으로 따라갈 뿐이라고 믿어지는 자가 주님의 목회에 부름 받은 자이다. 주님의 종은 교회를 크게 키우는 일에 기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8:20)고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만족하는 삶이다.

 

8. 오랜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교인들을 앞서서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긴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자 하는 정신을 문제 삼는 것이다. 학력을 높이거나 실력을 길러야 지식적으로 성경을 가지고 따지는 교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벽기도회나 공식 기도회 모임이 있으면 교인들이 다 돌아가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어야 영성으로도 교인들이 함부로 대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목회자의 기도나 성경 읽기는 자신이 주님과 더불어 죽고자 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기도가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을 장악하고 굴복시키고자 하는 대비용에 불과하다.

목회는 교인들을 어떻게 굴복시켜서 교회 안에서 아무 소리 못하도록 잠재우는 일에 성경으로 실력을 쌓고 기도로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12,13).

 

9. 교인들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목사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신의 목회 수고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직분이란 어떤 형태로 생겨났든 그것은 인간의 조직체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참된 교회란 주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봉사자들이다. 주님의 몸은 돈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에 붙잡힌 지체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베드로전서 4:10-11에 의하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 무궁토록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봉사를 한다는 것은 삯에 기대를 하지 않고 일한다는 차원이다. 돈을 주는 것을 일체 거절한다는 말이 아니라 돈 액수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거저 주신 힘과 은혜를 발산하고 또한 그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각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일한다는 것이다. 하박국 3:17-18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비록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자가 주님의 일에 부름 받은 자가 아닐까?

 

10.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면서도 주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장로나 권사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 아니라 교회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사람이 더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목회는 시비 거는(?) 사람들을 어쨌든 잘 구슬려서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잘 추스리는 것이 잘하는 목회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은 양이고 목사는 목자이기 때문에 양은 죽었다 깨어나도 목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믿고 양들 앞에서 목사는 목자로서 철저히 감출 것은 감추고 드러낼 만큼만 드러내어야 양들이 실족하지 않고 또한 목자를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권위가 세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주의 종이 아니라고 했다(1:10). 이 말씀이 모든 일을 목회자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에 매인 자로 주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10: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23:2-10). 이 말씀 앞에 철저히 굴복된 자가 주님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는 목사가 아닐까? 나 자신이 목사라는 직업병에 걸려 있지 않는지 늘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http://blog.daum.net/revealer 20001017/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