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민수기

03.민수기 3:1-4:49 레위인들의 직무

불편한 진리 2015. 1. 29. 16:17

 

민수기 3:1-4:49 

레위인들의 직무

 

3:7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라고 레위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레위인은 아론의 제사장 일도 담당하며 또한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즉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은 레위인이 특별히 뽑혀 나와서 대신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임무는 각 가족별로 달리 주어지고 있다. 게르손 자손은 성막과 장막의 덮개, 회막 문장, 뜰의 휘장과 줄 등이고, 고핫 자손은 증거궤와 상과 등대와 단, 성소의 봉사에 쓰이는 모든 기구등이며, 므라리 자손은 성막의 널판과 띠, 기둥, 받침, 말뚝과 줄 등이었다. 회막에 봉사할 수 있는 자는 30세에서 50세까지 8,580명이었다.

레위인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할 일을 대신 한다는 것은 레위인이 이스라엘, 즉 제사장 나라의 장자라는 말이다.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봉사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셨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셨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3:12,13).

보통 장자를 먼저 태어난 것으로 본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의 가족은 거부감 없이 모두가 다 에서를 장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방식으로 장자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셨다(25:23). 에서부터 먼저 출생하여 야곱이 에서를 극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장자 개념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장자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 안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에 있었던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이다. 모든 처음 난 것은 다 죽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만은 죽음을 면했다. 어린양이 죽음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린양이 대신해서 살아난 자를 가리켜서 처음 난 자라고 한다. 처음 난 자를 각 가정의 장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레위인으로 대치하셨다. 즉 혈통적 의미에서의 장자가 아닌 제사장 나라로서, 여호와의 군대라는 공동체의 한 지파가 전체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장자로 대신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장자를 공박하는 차원에서 주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대체했을 때에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뽑아서 헌신하게 하셨다. 이런 점에서 레위인을 장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자란 아버지의 속성을 담고 있는 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실은 바로를 죽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죽이면서 바로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제거당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는 아들이 죽는 것을 통해 지신이 하나님 앞에 죄악된 자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을 혈통적 차원에서 보지시 않는다.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혈통적인 차원에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은, 각 가정의 장자를 뽑지 않으시고 그 가정의 장자 대신 레위인으로 대신하셨다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이스라엘 전체를 제사장 나라로 보시며 그 가운데서 레위인을 장자로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희생을 담아내게 하셨다. 어린양의 희생을 대신해서 보여줄 자로 세움을 입은 자가 레위인이다.

레위인이 하나님의 희생을 담아내는 역할은 어떻게 하나? 레위기에서 이미 계시된 바와 같이 제사라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장자는 땅의 기업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기 때문에 제사만을 드린다. 후에 오신 예수님 역시 땅이 없이 유리하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이 곧 제사장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레위인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을 바라보면서 그 레위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즉 레위인이 희생하고 섬기는 그 모습이 바로 자신들이 희생하고 섬겨야 할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앞에 레위인을 세워 놓으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결국 레위인이 죄의 기준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기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준이 궁극적으로 누구인가?

우리의 잘못된 신관과 메시야관 때문에 진짜 메시야가 살해 당하셨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처리해 준다는 것을 온전히 믿게 하기 위해서 이루신 것이 십자가이다. 오늘날 누가 제사장이며 장자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셔서 하나님의 희생을 온전히 드러내신 예수님뿐이시다.

레위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선지서들을 보면 제사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말라기에서도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십일조란 복의 계통을 인정하는 표시였다. 즉 제사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이 어디서 오는지 십일조를 통해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구약의 레위인은 장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실패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희생적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자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만이 장자이시다.

그래서 인간 제사장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제사장의 기능을 행하는 자들은 있다. 그들이 곧 모든 성도이다. 구약에서 레위인들을 장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일이 목적이라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성막에 일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돕도록 레위인들을 세우신 것이 아니다. 레위인이 없어도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홀로 언약을 이루신 분이다. 하나님은 홀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일 자체를 위해 레위인들을 장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은 하나님의 손이 모자라서가 결코 아니다. 그러니 교회 봉사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된다. 또한 목회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교인들을 예배당에 묶어 놓아서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희생적 삶이다.

봉사란 단순히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주셨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알라는 것이다. 레위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이 없이 모두가 다 동일하게 성막의 봉사에 각 부분을 맡았듯이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관계없이 성도로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그 일을 위해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도록 한 지체가 된 것이다(4:11,12, 고전 12:12-21). 그러므로 성도란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자이다(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