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율법과 사랑
요한복음 8:1-11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을 통해서 앞으로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도 마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합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특징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비우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가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해탈(解脫), 또는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것은 철저히 부정되고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부되고 포기된 그 자리가 주님의 십자가와 같이 인간이 죽는 자리로 바뀌게 될 때에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기도하면서 헌금하면서 봉사하면서 전도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죄인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란 자기를 수양하는 종교입니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누구를 미친 듯이 바라보는 종교입니다. 즉 출발점이나 귀결점을 주님으로 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주님으로 마치게 된다고 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는 여자를 현장에서 잡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몰라서 자문을 구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빠뜨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고소할 조건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7:45-52,6절).
율법에 의하면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레 20:10). 과연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을 베풀어서 놓아주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율법의 말씀대로 죽이라고 할 것인가? 예수님이 어느 것을 말씀하시든지 둘 다 공격의 빌미가 되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으로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7절). 이렇게 말씀하신 이후에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다 쓰셨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9절). 왜 어른부터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인생이 오래 살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오래 살았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만큼 죄를 더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끝에 남아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여자가 남은 것은 인간의 죄인 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죄를 지은 것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고 자신의 그러한 죄인 됨으로 인하여 도망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이러한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에게 누가 돌을 들고 칠 수 있습니까? 이 여인 앞에 계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기에 예수님이 남은 것은 자신이 율법대로 돌로 죄인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돌로 그 여인을 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인을 향해서 돌로 칩니까? 치지 않습니까? 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11절). 예수님도 율법을 가지고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유일하게 율법을 가지고 율법대로 여인을 칠 수 있는 분이 더 이상 정죄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율법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죽이지 아니하십니다. 이렇게 율법을 가지고 곧이곧대로 적용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율법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율법이 적용된다면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 이상 누구도 율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하거나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남은 것은 율법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7:49에 보니까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바리새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는 율법을 몰라서 지금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님까지 지금 싸잡아서 율법의 저주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율법을 몰라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 아래 있고 결국 그 죄로 인하여 자기 죄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에서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율법의 적용대로 해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는 죽음으로 모든 율법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앞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 죽음은 곧 모든 율법을 철저히 자신에게 적용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율법을 엄격히 적용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죽어야 할 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셔서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할 그 죄인으로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계명을 통해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 간음을 해서는 안 돼!’ 라고 하는 금지령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 간음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셔야만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원래의 취지는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철두철미하게 적용해서 그 사람을 공격하고 정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을 칠 자가 대신 담당하고 그를 사랑의 입장에서 용서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롬13:10).
사람들은 우리들을 정죄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람들은 나를 정죄할 것입니다. 무엇을 잘한다 못한다 판단하면서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정죄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누구도 인간은 서로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죄란 하나님 앞에서까지 떳떳해지고 당당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떳떳하고 당당해지고 싶어서 기도하고 헌금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한 점도 부끄럼이 없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은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수양하고 돌아보고 반성하면 앞으로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알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자존심이 꺾어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를 아는 죄인으로 고백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하여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용서한다는 의미도 인간이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신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1996년 11월 3일/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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