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19.요한복음 7:14-36 표적

불편한 진리 2015. 1. 21. 17:18

19

표 적

요한복음 7:14-36

 

 

히브리서 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믿음으로만 대할 수 있는 분임을 인정합니까? 그렇다면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믿음에 관한 것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이는 목사로 바꾸려고 합니다. 보이는 예배당을 하늘나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예배당을 거창하고 엄숙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많은 교인들은 주님을 예배당이라는 감옥 안에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을 다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한 단면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는 것 때문에 선악과를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들을 소유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산에 가면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꺾어서 집에 가져가고 싶은 것입니다. 하다못해 아름다운 것을 사진으로라도 찍어서 소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모아놓고 싶은 것은 죄인이라면 누구든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마치 불교신자가 집에다 불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 신으로 두고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컨대, 신자들은 교회에 와서도 자신의 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마치 무슨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준 능력은 이런 것이다. 이것 자랑하려고 교회에 모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만큼 사랑한다는 자랑말입니다. 자기가 받은 방언, 자기가 받은 능력, 자기가 받은 은사가 다른 사람이 받은 것보다는 더 크고 강하며 더 월등한 것임을 자랑합니다. 그렇게 자랑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것 자랑하려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능력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초점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고, 주님께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과연 교회로 모이는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명기 34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10-12). 모세의 생애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셔서 큰 기사와 권능을 행하게 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로 모세의 생애는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했습니다.

예컨대, 홍해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봅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 홍해의 표적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까 인간은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사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것입니다.

시편에 보니까 아삽은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74:10)라고 쓰고 있습니다. 표적이 보이지 않는 것과 선지자가 나타나는 것을 연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4장에서 그 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으로 선지자가 나타나면 놀라운 이적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이란 자신이 선지자로서 행하신 표적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많으랴”(31)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 이만큼 많은 이적을 일으킨 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 이후에 큰 권능과 기사를 행하는 자로 모세가 예언하였던 그 선지자”(18:15)란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많은 표적, 도무지 인간이라면 행하지 못하는 그러한 표적을 행한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구원의 표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3:2).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무리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6:14). 그러나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앞세우며 표적을 이해했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야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심으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표적을 말씀하실 때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39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참고 16:4)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시겠다고 하면서 자신도 선지자로서 보일 수 있는 표적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겠다는 표적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오직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표적을 보여줌으로써 이 시대가 얼마나 악한가를 공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실로 십자가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 하는 것이 폭로된 자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하는 엄청난 죄악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얼마나 악한 자들인가?’ 이것이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표적을 통해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정적으로 십자가의 표적을 통해 인간의 악함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표적을 통해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 자신의 구원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이 이만큼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좋아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자는 없었다고 고발하시면서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십자가를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표적은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표적이 있습니까? 만약 이것보다 더 큰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함의 증거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예수를 믿습니까? 하나님의 능력마저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그렇다면 일찌감치 그런 면에 있어서만큼은 포기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를 원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고 오직 구원의 길이 하나님 편에서만 제시한 길임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다”(고전1:22-23)<19961013/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