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
누가복음 12:49-59
심판과 회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을 우리의 선택이라는 입장에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게 되었기 때문에 종과 청지기의 입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종과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 안에서 성도는 종이나 혹은 청지기적 입장에서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 고난이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렇게 밝히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49-50절).
‘불’이란 심판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께서 땅에 대하여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심판을 행하시는가? 그것을 50절에서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가 있다고 하셨다. 어떤 세례인가? 누가복음 3:16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한 바가 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을 하시기 위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마가복음 10:39에 보면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즉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세례로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먼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가 있다고 밝히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란 무엇인가? 50절에서 “그 이루기까지”라는 표현은 어떤 것을 성취하고 완성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대속의 죽음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주신 언약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직전 제자들과 가진 유월절 만찬에서 포도주와 떡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새 언약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고자 하셨다. 그것을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로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다. 무지한 죄인들로 인하여 주님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인간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결코 화평을 주러 오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51절). 누가복음 1:79의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는 말씀이나 2:14에 의하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예수님은 평화를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모순된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온 목적을 번복하신 것인가? 이 둘 다 아니다.
예수님은 전쟁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홀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시는 방법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사역의 결과는 분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 때문이다. 죄는 복음을 거부하고 생명을 무시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 아래 있는 혈통적 관계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분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가족간의 갈등과 분쟁이 있어야만 신앙 생활을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그러한 갈등과 분쟁이 없으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아니다. 어떤 자들은 이 말씀을 오해하여 일부러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또 가족들에게서 핍박을 받아야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하여서 가족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을 즐기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종말론적 현상이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미가 선지자가 외친 것을 보면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6)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는 7:7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는 선지자의 선포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다. 종말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곧 종말이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마지막 선지자로서 바로 이런 모습으로 오셨고 또한 이렇게 사셨던 것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 의미를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9-13). 혈통이나 육정, 사람의 뜻으로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생명이고 진정한 빛이다. 사람의 관계성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을 때를 구원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다 어두움에 거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종말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54-56절).
예수님은 이 시대를 죄악된 상태라고 규정하셨다.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 7:31-32). 죄를 짓기를 즐겨하고 죄악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이 땅의 모습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날씨에 대한 판단은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잘 하면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이 죄악의 상태에 거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참으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상태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당면한 때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에 직면하는 때이고 그 메시지 곧 복음에 의해 회개가 터져 나와야 할 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 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58-59절).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은 법정의 재판관이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에 있지 않다. 또 화해하라는 것이 법정으로 가는 당사자와 화해하는 것인데 그가 바로 이웃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다.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고소하는 자와 함께 가고 있는 길 위에서 화해하는 방법 밖에 없다. 재판이라는 재앙이 다가오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화해하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회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예수님과 무리들이 길 위에 있고, 그 무리들은 한정된 시간 안에 고발자가 되시는 예수님과 화해하지 않으면 결코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어떤 행위로 임박한 심판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 외에 종말에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회개가 방법이라는 말이 아니라 임박한 심판 앞에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회개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주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서게 된다. 아니 성도에게는 항상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고 주님 십자가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에 드러나는 성도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신 은혜를 생각하는 성도라면 자신의 사소한 죄까지도 결코 사소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회개가 날마다 터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10.13).
'●──── 신약강론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44.누가복음 13:10-21 귀신들린 여인 (0) | 2014.12.23 |
---|---|
43.누가복음 13:1-9 무화과나무 비유 (0) | 2014.12.23 |
41.누가복음 12:35-48 종과 청지기 비유 (0) | 2014.12.23 |
40.누가복음 12:13-34 어리석은 부자 (0) | 2014.12.20 |
39.누가복음 12:1-12 바리새인의 누룩 (0) | 2014.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