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41.누가복음 12:35-48 종과 청지기 비유

불편한 진리 2014. 12. 2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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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35-48 

종과 청지기 비유

 

본문은 깨어서 집주인을 기다리는 충성된 종의 비유(35-40)와 지혜로운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41-48)로 구성된다. 35-36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행동을 민첩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등불을 켜고 서 있다는 것은 어떤 일을 대하여 곧장 대처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종은 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항상 완벽하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종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또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우리에게 완벽한 준비를 하고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을 권면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가? 12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심판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선이나 가식으로 자신을 가리고 스스로 구원받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그 은혜의 역사를 따라 사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13절 이하에서 탐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위선과 가식으로 스스로를 가리고 있는 인간의 죄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드러내신다고 하셨다. 그 방법은 재물이라는 것을 주심으로 인간의 탐심을 폭로하시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탐심을 좇아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기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살게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먹고 입으며 거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면 의식주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주고자 하신 뜻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는 의식주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인간이 어떻게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결코 없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지 말고 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이끌려 사는 자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성도와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곧 이 땅에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며 그분을 좇아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사는 삶이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의 먹고 입으며 거주하는 문제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사는 삶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이런 관계, 이런 삶을 살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34절에서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무엇을 보물로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물질이 우리의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보물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물로 여기고 있느냐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충성된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안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를 물으신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단순히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특권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지만 종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고백은 이런 것이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15:21).

하나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보물로 여긴다면 항상 그분이 오시기를 구하는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비하는 삶이고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40)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 즉 고난받으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미래에 다시 오실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재림에 대한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된다. 왜냐하면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종들을 섬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37).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앉히고 수종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주인으로서 자기 종들을 섬기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섬길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말씀하신 약속을 의지하고 메시야를 기다린 자들은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였던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약속 안에서 주님의 섬기심을 받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실 수밖에 없다. 그 약속을 성취하고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하여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자녀라는 특권만 생각하기보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는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는 종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복이 있는 자들이다. 복이 있다고 해서 무엇인가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통념으로서 주인이 종을 섬기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주인으로서 종된 자기 백성들을 섬기신다. 주인에 의해 섬김을 받게 되는 그것이 바로 복이다.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7, 38).

 

결국 충성된 종의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여기며 그분을 늘 기다리며 동시에 그분만 바라보고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삶이다. 예수님 그분이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41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는다.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예비하고 있는 자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라고 묻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직접적인 답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다.

 

먼저 지혜로운 청지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42-44). 집의 관리를 맡은 신실한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면서 주인을 대신하여 가사를 책임진다.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하지 않고 주인의 수하에 있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는 직무를 잘 한다면 그 종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뜻을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주인이 있든 없든 한결같은 마음으로 직무를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악한 청지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45-47). 지혜로운 청지기와는 대조적으로 악한 청지기는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무시하며 살았다. 즉 주인의 뜻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했느냐 얼마나 많이 맡은 청지기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인의 뜻을 알고 주인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 47절의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악한 종을 실제적으로 때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45절에서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이라는 악한 종이 취한 행동과 대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48절에 보면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받은 달란트가 크면 클수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아는 그것이 곧 많이 맡은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주인의 뜻을 안다면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청지기의 모습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성도는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자이다. 십자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결코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십자가를 좇아 사는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많이 맡은 자이다. 많이 맡은 자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결코 세상에서 잘 살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 나라를 구하는 삶이요 그것이 곧 세상의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 안에서 주님을 예비하는 종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예수님은 49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다시 한 번 밝히신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