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7강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10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흔히 말하기를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스칼이라는 사람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 생각이라는 것을 빼버리면 갈대나 잡초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여 그 위대성을 이야기하는 요소를 ‘생각’을 한다는 것으로 특징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위대한 인간의 생각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하나님으로 기뻐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습니다. 그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7).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도록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일에 관심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생명 실과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누리는 차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니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로 죄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의 관심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을 통해 드러난 것은 표면적으로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화를 내고 아벨을 죽이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는데 왜 하나님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제사를 받고 안 받고 하느냐 라는 항변이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는 하나님이 왜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까 하는 문제점을 자신의 죄악으로 생각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거부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자신도 하나님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방향은 순전히 자기 자신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까? 자신을 하나님으로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한 부분만큼은 다른 신의 도움을 받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러한 차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동원되는 것이 종교적 의식입니다. 우리는 온갖 종교적 의식을 행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의 힘을 내게로 끌어당겨 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 의식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것은 구약 시대로 끝났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계속 상고해 오는 중에 우리는 이제 10장에 접어들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제까지 첫 번째 언약, 즉 모세 언약을 통해 계시하신 율법과 두 번째 언약, 즉 새 언약을 대조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제사 제도와 관련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설명을 오늘 본문 10장 초두에서 요약하여 정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1,2절).
제사 의식 그 자체로는 결코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사 의식은 모형이요 그림자로써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결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가 반복된다는 것에서도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계속하여 제사를 반복하여 드리며, 해마다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최종적이지 않다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드린 제사는 단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하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3,4절). 히브리서 기록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구약의 제사를 평가 절하하고자 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형상으로 오셔서 십자가 희생으로 드린 온전한 제사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5-7절). 이 말씀은 히브리서 기록자가 구약의 시편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40:6-8 말씀을 봅시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40편은 다윗의 시로 ‘감사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험과 절망의 순간으로부터 구출받은 자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다윗은 예언자적 입장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정한 예물은 희생 제사와 예물들, 번제와 속죄제들이 아님을 먼저 천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드리려고 가져온 것은 ‘두루마리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루마리 책은 아마도 다윗이 당한 불행과 그로부터의 구출에 관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자신을 모든 불행과 재난 가운데서 구출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기록한 일종의 고백문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다윗이 드리려는 감사의 예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감사와 찬양은 외형적 예물들(짐승의 피와 기름, 각종 제사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베푸신 구원 행위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표현으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며 언약의 말씀인 율법을 행하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시편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라고 하여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 속에서 히브리서 기록자가 강조해 주고 있는 ‘세상’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를 통해 결정적인 희생 제사를 드린 그 영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9:1과 11절이나 24절에서 손으로 지은 ‘세상의 성소’에 들어가시지 않으시고 하늘 성소인 ‘참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표현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세상이라는 영역에서 대제사장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셨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세상이 아닌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완전한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 그 자체가 세상이라는 장막 안에서 드려질 희생 제물로 의도되었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록자의 설명입니다.
따라서는 히브리서 기록자는 7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두루마리 책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많은 고난과 비참, 불행들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원되어진 사실을 담고 있는 율법서이며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일하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7절).
이처럼 히브리서 기록자는 시편 40편을 인용함으로써 구약의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과 너무나도 분명한 대조적인 관계, 즉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온전한 한 인간으로 오셔서 구약에서 행해졌던 제사 제도가 보여주고자 했던 본질적인 모든 것들을 온전히 보여주고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언약은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한 순종을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8절).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제사를 원하셨고 기뻐하셨으며 인정하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동일하게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원하지도 않으셨고 그것으로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9절에서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온전한 둘째 것을 세우고 나니 첫 번째 것은 자연히 폐지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째 것을 세우기 위하여 첫 번째 것을 의도적으로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째 것도 필요하고 첫 번째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둘째 것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것이 전부라는 말입니다. 둘째 것에만 온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것을 세우는 이 뜻을 따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절). 결국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레위 제사장들이 드렸던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시는 이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이 온전한 희생 제사를 두고 동물의 피를 흘려 드리는 제사가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십자가를 지기로 선언하시는 아들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하나님의 기쁨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좇아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어 십자가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린 이 제사에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인간이 죄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배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생명의 진정한 본질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안에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6:38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언약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희생 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희생 안에서만 자기 백성들을 만나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만 하나님의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셨기 때문에 언약의 피를 흘리시는 순종을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경우나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땅의 것으로는 하나님의 거룩에 포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한다는 것으로 규정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안에서만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 안에서만 이야기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 순종, 내 행위, 나의 학력, 종교적 의식 이러한 것들이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러한 우리의 행위나 순종은 오히려 주님께 해를 입히고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순종하신 십자가에 모든 기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고 했습니다.
따라서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일치시키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메마른 도덕주의가 아니며 꼼꼼하게 하나 하나를 갖가지 율법 조항에다가 억지로 맞추는 식의 굴종의 생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다 하셨고 또 다 하시니까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자고 하는 방종의 생활도 아닙니다. 누차 말씀 드리지만 성도가 누리는 자유란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자유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대로 무엇인가 할 수 없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없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관심이 이미 자기 자신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다른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몸은 여기에 있으나 우리의 생각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어디론가 끊임없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집안 걱정, 회사 일에 대한 걱정, 자식에 대한 걱정들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로 우리의 머리는 복잡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헛된 쪽으로, 자기 종교 행위를 만드는 쪽으로 늘 가고 있는데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든지 아니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요즘 ‘크로스빌리지’(crossvillage)라는 홈페이지의 게시판을 보면서 참으로 답답함을 많이 느낍니다. 신학적인 논쟁을 빌미로 저마다 자기 신학과 자기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죄인이란 남을 공격하고 남의 자존심을 밟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영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선언하시고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오직 십자가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고 계십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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