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5강
언약의 피
히브리서 9:16-22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두 강도가 함께 못 박혔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향해 비방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막을 보면 한 사람은 비방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비방하는 사람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 그리고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에 두 강도가 처음에는 동일하게 예수님을 향해 조롱하고 비방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은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을 면밀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마는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셨고 거기에 모든 제자들도 철저하게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강도로 같이 죽어가는 입장에서도 같은 처지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였다고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철저하게 모든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고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심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자인 누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자들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편 강도에 대한 입장을 놓치지 않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마태복음이든 누가복음이든 공통적으로 이러한 기록들을 가지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 존재인가를 예수님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실상을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두고 오래 전에 이렇게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3:12).
물론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가 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다는 것이 두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같이 되셨고 죄인들과 같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고 있는 초점은 그것이 바로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메시야의 죽음이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 메시야가 와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한 편 강도의 고백 속에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1을 다시 봅시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성경이 이러한 기록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이 행악자라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자신의 행위를 따라 죽는 것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은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만이 진리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런데 이러한 선언은 비단 신약 성경에서만 나타나는 선언이 아닙니다. 시편 기록자인 다윗도 이미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인류의 대표되는 아담이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자 한 마음 때문에 악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기에 결국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죄인이 생명 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뱀을 향해 저주의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언약을 포함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뱀, 즉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그에 종노릇하며 살도록 가만히 두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 관계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하여 마귀와 원수의 관계가 되도록 하셔야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마귀의 지배를 받고 그에게 종노릇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고자 하는 여인의 후손과 뱀, 즉 마귀의 후손이라는 두 부류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여인의 후손은 하나님께서 마귀의 후손과 원수가 되도록 한 것 때문에 등장하게 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이 아닌 뱀의 머리(네 머리), 즉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여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한 가지 알 수 있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라는 것이 죄인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란 여인의 후손이 등장하여 마귀의 머리를 밟을 때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 것입니까?
출애굽기 19:5,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내산 아래 불러 모으시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시어 모세를 통해 언약을 주시게 됩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시내 산 아래에 단을 쌓고 거기에서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단에 뿌리고 언약에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고 선언합니다. 왜 여기서 하나님은 제물을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언약의 피를 뿌리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희생되어야 언약이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피흘림만이 생명을 속하기 때문입니다(레 17:11). 누군가 희생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생명에 포함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흘림과 피뿌림을 통해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용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1)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리고 피를 뿌리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유월절 행사를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으로 죽음을 면하게 하는 행사를 치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6-29).
유월절 식사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20에서도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15절에서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며 그 분이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기 위하여 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16,17절). 본문에서 ‘유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데 여기서 우리 성경에 유언이라고 한 것은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유언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앞에 1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기업’에 대하여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업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것은 유언을 한 자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을 한 당사자, 즉 언약을 한 당사자가 죽지 않고서는 효력이 발생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당사자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온전히 성취되었고 또한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기업이 주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언약의 당사자로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그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의 성막, 성전에서 제물을 잡아 희생의 피를 흘리고 뿌려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하여 제사 제도가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에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피를 바릅니다(레 8:23,24).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도구에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21절).
구약에서 동물의 피를 흘리고 뿌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었다면 어찌 거룩하고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히 9:14). 첫 언약,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자신과 백성들의 허물을 위해 일 년에 한 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면 어찌 단번에 완전한 제사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피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피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강론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피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피로 하나님께 드리게 하신 그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주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일체 받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영광 돌리면 받고 우리가 영광 돌리지 않으면 군침 흘리고 있다가도 그만 두어야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2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 방법이 언약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피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피만 들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11-17에 보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릅니다. 과부에게 아들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 장례 행렬이 누구를 만나는가 하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과부의 아들을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기대나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죽음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은 생명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가고 계셨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결국 그 생명을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죽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살아 있다고 하나 죽은 존재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시체에 불과합니다. 그 시체 안에 주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의 삶의 아니라 주님의 삶이고 주의 영이 주장하시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4-26).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결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를 덧입은 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살았다는(구원받았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살려주신 분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성경은 언약 백성이요 성도요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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