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2강
새 언약
히브리서 8:6-13
전도서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8-10). 해 아래 인간은 날마다 수고하지만 있던 것에서 늘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있던 것에서의 변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정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날마다 헛된 수고라고 전도자는 표현했습니다.
이 땅에 새로운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이라고 만끽하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3:14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해 아래에서 하는 인간의 수고는 모두 소포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일하심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것은 헛된 수고의 반복이기 때문에 이 땅의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이 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하늘의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땅에서의 수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다시 이 땅에 주시는 것을 가지고 성경은 영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처소란 단순히 하늘의 어떤 곳을 장소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통해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그것이 처소요 곧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리란 십자가에 있고 새로운 것이란 이 땅에 어떤 것도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는 이것이 새로운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8:1에서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라고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대제사장의 사역을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옛 언약과 대비된 새 언약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까?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이것이 새 언약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첫 언약이 흠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새 언약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첫 언약이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언약입니다.
성막을 만들도록 지시를 받은 시내 산에서의 모세 언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끊임없이 파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온전히 수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국 시대의 역사는 언약을 무시하는 불순종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십일조도 제대로 행하지 않아 제사 제도 자체가 무산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구약 성경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공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반항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 다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선지자들이 외치고 있는 심판은 바로 이런 점에서 선언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19-22).
그러므로 율법은 가입된 것입니다. 중간에 끼워 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집어넣으신 것입니까? 곧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 의미가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거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2-14)라고 했습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다만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리는 인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 언약으로서는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인간은 죄를 깨닫고 누군가 와서 율법의 말씀을 완전히 지키도록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죄가 율법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 죄를 이기는 분이 오셔서 죄를 이기게 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옛 언약을 가지고서는 온전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 언약의 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깬다고 해서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늘 언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파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하며 불순종할 때에 언약을 더욱 확고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이먀 선지자를 통해 이런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1-34).
오늘 본문 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흠이 없었지만 인간들의 허물이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화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8,9절).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주셨던 언약과는 같지 않은 새 언약을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본문 6절에서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써 앞에서 설명했던 것의 반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과 대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직분을 온전히 성취하신 후, 그러한 성취의 결과로 하늘에 있는 참 성소로 들어가신 참 대제사장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직분은 옛 언약보다 훨씬 더 뛰어난데, 이는 하늘의 것이 땅의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높고, 영원한 실체가 일시적인 모형보다 뛰어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중재하신 언약은 좋은 약속 위에 근거하여 세워진 더 좋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반차가 옛 반차보다 본질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이 단언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22에서 이미 “더 좋은 언약의 보증”으로 묘사되셨고, 이러한 보증은 그의 영원한 제사장직의 본질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맹세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린 영원한 희생의 영원한 결과에 근거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2:19,20에 의하면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십자가를 지고 거기서 흘리는 피가 곧 새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이 옛 언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좋은 언약을 중재하신 분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로 불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히 9:15, 13:24). 요한복음에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고 했고, 또한 바울 사도도 모세를 율법의 중재자로 표현함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강조했습니다(갈 3:19-22).
율법 자체는 신령하지만 인간이 죄 아래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는 결코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고, 또한 자신을 제물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거기에 어떤 것도 심지어 구약의 율법이라도 견줄 수 없는 것이기에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한 마디로 돌비에 새긴 언약이 아니고 마음에 새긴 언약이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10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의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그의 영에 의해 움직여지고 행해지는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돌비에 새겨서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육의 심비에 새겨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고후 3:3). 새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 백성들 속에 넣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이 생명이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능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나의 기쁨과 나의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의 존재로 사는 우리는 육입니다. 이 육으로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도 없고 주님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육은 율법의 말씀을 가지고 철저히 실패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아니 이제까지 하신 하나님의 모든 옛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이 새 언약에 의해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하도록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이 땅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5,27). 하나님이 성도에게 약속하신 유일한 약속은 영생, 곧 주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그 생명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록자의 이러한 선포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는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예수가 어떻게 제사장이 될 수 있는가? 그는 레위 지파도 아니지 않는가? 또 그가 제사장이라 해도 어찌 제사를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는가? 구약의 제사장들은 늘 제사를 반복했는데 그리스도는 한 번 제사로 영원히 죄를 사한다니, 그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씻어진다는 말인가?’ 끝없는 의심으로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에게 히브리서 기록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과 그의 십자가 죽음이 희생 제물이 되는 제사였다는 사실을 구약을 들어가면서 논리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제 갈 길로 간 탓입니다. 그래서 이제 연약한 인간들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모든 언약들을 온전히 성취하셨으니 우리들은 그분을 믿고 의지하므로 언약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이제 그 역할이 끝났습니다(13절). 이제 새 언약이 적용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아니 이제 새 언약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모형이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던 옛 언약에 의한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새로운 제물, 즉 짐승의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 피 흘리는 죽음이며, 새 언약의 제사장은 계속 반복하며 흉내 내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신 멜기세덱 반열의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부서지는 돌판 대신 우리 마음에 새 언약의 말씀을 새기시는 것입니까?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10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진정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오해해 왔습니다. 이 땅에서 큰 업적을 이루고 엄청난 역사를 펼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일을 벌여놓고는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하면서 자화자찬을 일삼았습니다.
다시 우리는 말씀 안에서 아버지 뜻을 확인해야 합니다.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하나님도 좋아하시겠지’라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고 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한 순간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 죄인임을 가슴아파하는 자라야 그리스도의 용서가 기쁨이요 감격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늘 반복되어 적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용서받았다고 해서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 오실 때까지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항상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십자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 종교적 선을 쌓는 것을 통해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내일도 끝없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정결케 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 새 언약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기로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더 이상 세상의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지 않기로 합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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