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0강
단번에 드린 제사
히브리서 7:26-28
지금 한국 기독교계는 목회자의 부자 세습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물론 큰 교회들이 처음부터 자기 자녀에게 교회를 물려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후임 목회자로 거론된 목사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우선 자신이 큰 교회를 이끌어 갈 자신이 없다는 것으로 고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심 어려워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전임 목회자가 이루어놓은 카리스마적인 지도 체제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기에는 상당히 어렵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곳을 택하겠다는 것과 전임 목회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어떻게 맞추어 나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대형 교회들은 마땅한 후임자를 선정하지 못하자 전임 목회자의 목회 방침과 동일한 카리스마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아들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임 목회자 또한 제삼자가 마음에 들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임 목회자의 아들이 세습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담임목사가 된 모 목사는 테러까지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사회 일각에서는 교회의 부자 세습에 대한 비판보도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성경적으로 다시 되짚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교회가 부자 세습이라는 문제를 볼 때에 과연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또한 목회와 목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전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전부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를 대물림 하고자 하는 목사는 자기 소유를 잘 유지시킬 수 있는 자가 자기 아들이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목회자의 이러한 사고방식의 심각성은 또 다른 나를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자체 기도원의 엄청난 재산 관리와 수천 명의 교인들을 어느 누가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또 다른 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못 믿는 증거입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교회를 크게 키우기까지 해온 자기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하지 않도록 영원무궁토록 잘 발전시켜 자신의 아성을 굳건히 다져 나가서 결국 자기 이름을 내자는 기업 이념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의 심각성을 느낀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는 ‘교회 세습 반대 기자회견’을 하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담임목사 세습은 물량주의, 강단권 독점, 비뚤어진 자식 사랑이 낳은 비 성경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혈연관계에 의지해서 교회의 평안을 추구하려는 것은 이미 교회가 깊이 병들어 있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9월에 각 교단마다 열리는 총회에서 세습을 막기 위해 교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교회 세습을 반대하는 이유는 교회 세습으로 인해 복음 선포와 확장이 심각한 장애에 부딪히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우리 손에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 목회, 복음이 선포되는 강단권, 심지어는 우리의 자녀까지도 우리 손에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나왔고 주님께서 관리하시며 결국 주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는 오늘날 교회의 부자 세습에 대한 문제 때문에 한국 교회가 병들어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있는 교회를 구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집단적인 운동이라도 해야 교회가 더 심각하게 병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는 결과로 나온 행동들입니다.
교회의 부자 세습, 그것을 반대한다 찬성한다는 것으로 의견이 분분한데 실상을 따지고 보면 논란을 삼을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가 전임 목회자가 은퇴하게 되면 아들이라고 해서 담임목회자가 되지 못하란 법이 있습니까?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의 현상을 볼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원리적인 면으로 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이지 기업체로서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주님의 몸으로서 주님께서 머리가 되셔서 움직여지는 교회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헛된 꿈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망상이 한국 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아닌 것을 교회 되게 하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물질과 노력들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세우신 교회는 결코 그런 식으로 해서 세워지고 교회답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이미 세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이미 주님의 교회는 확정되었습니다. 주님의 피에 의해 확정된 교회가 우리 눈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날마다 확인해야 할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러한 모습이 주님의 몸의 모습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몸을 통해 어떻게 일하고 계신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의하면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이제까지 히브리 기록자가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7:25)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아주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하다는 것입니까?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며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고 악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또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다 동일한 의미의 말씀입니다. 같은 뜻으로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의로운 분으로 구별되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는 의미는 비록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의 죄와는 상관없이 의롭고 거룩하여 구별된 존재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루어 내셨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분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라고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존재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분이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는 선언은 모든 인간들을 죄인이라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로운 부분이 있고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왜 죄와 상관없는 하늘에서 의로운 분이 오셔야 되었습니까? 하늘에서 의로운 분이 오셨다는 말은 인간 세계에서는 의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구약 성경에서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자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선택을 받고 따로 구별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신적 은혜의 작용으로부터 오는 거룩함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함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서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다른 사람의 중보의 직무를 행하기에 앞서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백성들을 위한 중보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는 사실상 제거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존재하였습니다. 즉 진정한 속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많은 제사장이 계속적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죄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됨으로 속죄의 온전한 사역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신을 제물로 드린 단 한번의 제사였습니다. 더 이상 구약의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처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히 10:12)의 영원한 완전성과 유효성을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타 온갖 제사 제도의 부인과 철폐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이고 영원한 것이 왔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불충분한 것이 존속할 여지를 더 이상 남겨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통해 계속되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계속된 죄인의 연속이지만, 단번에 드린 영원한 제사는 계속된 영생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분의 제사장으로 이루어진 단번에 드려진 십자가의 피의 제사는 완전하고 충분한 것입니다. 반복을 요구하거나 추가를 요구하는 것을 불허하는 제사입니다. 우리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28절에서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온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율법 후에 세우신 맹세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시편 11:4에서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선언하신 맹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 후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만일 율법 및 레위 제사장직이 완전성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면 다른 반열에 속한 또 하나의 제사장 임명에 관하여 나중에 맹세할 필요가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제사장들을 계속 세웠지만 맹세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24절에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된 제사장의 등장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갈리는 것은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주님과 더불어 죽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끝까지 고집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자기 행위를 길이 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경험을 중요시여기는 것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고 했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세의 능력을 체험했다는 것이 그리 중요합니까? 그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날마다 나 자신이 죽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옛날에 얼마나 뜨겁게 했는가 하는 이런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일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취급할 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과거에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물질을 드렸는가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돈으로 예배당을 100개 지었다고 한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자신의 부의 축적 외에 또 다른 종교적 바벨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단번에 드리신 희생에 견주지 마십시오.
이런 점에서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 세습과 같은 의미로 목회의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도 틈새 시장을 공략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신학생들은 앞으로 목사가 되면 갈 곳이 없다는 위기감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로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목회를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틈새시장을 잘 공략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셔야 교회다운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목회자의 부자 세습이라는 문제가 복음이 전파되고 확장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 주님은 죽은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엄연히 살아 계십니다. 여전히 바쁘게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사장 세습이 죄인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이 죄인을 살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목사의 부자 세습을 통해 교회를 교회답게 이어나가려고 하는 발상은 주님의 몸을 욕되게 하는 죄악의 소산물입니다. 주님의 머리되심을 무시하며 주님을 공격하는 원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신 단번의 제사 그것으로 모든 것이 말끔하게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여전히 홀로 십자가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들이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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