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3:1-17
갈라진 요단강
제가 과거 어떤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중에서 본 장에 대한 설교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요단강 물이 갈라졌다고 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문제라고 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큰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음을 강조했다. 우리도 모든 일에 믿음으로 나가기면 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성경해석이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면 모든 일이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라면 구원이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는 문제이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가는 것도 내 믿음을 가지고 하기 나름이지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가능한가? 하나님은 믿음의 법칙을 세워놓고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오라고 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을 할 때에 그 의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나님이 일하고 우리가 믿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
본 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15,16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물에 발을 들여놓자 흐르던 물이 그쳤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제사장의 발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그렇다고 제사장들의 믿음 때문도 아니다. 11절에 보면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라고 했다.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발을 요단강에 들여놓았기 때문에 강이 갈라진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들어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강이 갈라진 원인은 언약궤에 있지 제사장들의 믿음과 그에 따�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궤란 하나님이 임재 해 계셔서 말씀으로 다스리신다는 상징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들인 이스라엘 중에 거하실 수 있으며 말씀으로 다스리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죄인 중에 거하실 수도 없을뿐더러 말씀을 드러내시면 이스라엘은 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언약궤 위에 속죄소라는 것으로 덮어두게 되고 또한 그 앞에서 제사 제물의 피가 뿌려지기 때문이다. 즉 희생의 피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희생의 피가 이스라엘 앞에 행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한 것이다. 이 희생의 피를 제쳐두고 인간의 수고와 노력, 공로를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의 피를 무시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희생의 피가 뿌려지는 언약궤를 따라만 가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요단강을 건너는 체험을 하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계획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지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 차원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살아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 안에서 살게 하신 것이다. 자기들이 알았든 몰랐든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 민족이다. 그리고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너게 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지금껏 내 힘으로 사는 줄을 알았는데 요단을 건너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와 신실하심이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했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다.
특히 15절에 보면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요단을 건넌 것이 얕은 물을 작은 개울을 건너듯이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었다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요단강이 갈라지는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되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7절)고 하셨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10절)고 하셨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세와 함께 하던 것 같이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시는가 하는 문제와 앞으로 가나안의 많은 족속들을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서 제대로 정복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보여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단강을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분명히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요단강의 흐름을 막고 건넌 것은 앞으로 여호수아로 하여금 가나안 땅의 어떤 대적도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정복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가르는 것을 통해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쪽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의 피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희생에 의한 것이지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널 동안 언약궤는 요단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희생이란 십자가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13절에 보면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고 함으로 하나님께서 요단의 물을 밟고 계신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이적을 베푸셨다. 그 가운데서도 마태복음 14:24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파도가 심하게 일어나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배에 오셨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분이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그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욥기 9:8에 의하면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물 위를 걸으심으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위해 희생을 치르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요단강을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시게 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희생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을 보여 주셨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가지고 홍해를 가르신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같은 이적을 반복해서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시다. 똑같은 이적을 계속해서 일으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기에서 구하는 목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가 이러한 기적을 원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신앙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신앙이란 자신이 우상이 된 종교 생활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홍해를 다시 가르지 않으시고, 요단강을 다시 가르지 않으신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전부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나타내셨던 이적도 결국은 십자가를 말씀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신 것을 믿는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십자가를 더 얹는다는 말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고백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길 줄 아는 자가 성도이다(빌 3:8)(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 구약강론 > 여호수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여호수아 6:1-27 여리고 성 (0) | 2014.09.03 |
---|---|
05.여호수아 5:1-15 할례와 군대장관 (0) | 2014.09.02 |
04.여호수아 4:1-24 요단강의 열두 돌 (0) | 2014.09.02 |
02.여호수아 2:1-24 정탐꾼 파송 (0) | 2014.09.02 |
01.여호수아 1:1-18 종 여호수아 (0) | 2014.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