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만사를 변화시킨다?
길을 가다가 어떤 예배당 현관에 이렇게 쓰인 현수막을 본 적이 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로 만사를 변화시킨다면 기도가 만능 열쇠란 말인가? 기도에 대한 오해가 이렇게 클까? 그러면서 생각난 성경 말씀이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비유였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것이 없어서 이웃에게 가서 떡 세 덩이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이웃은 이미 침소에 들었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하자 간청하는 것에 못이겨 떡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보통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친구가 끈질기게 요청함으로 인해 원하는 바를 이룬 것처럼 우리도 기도로 하나님께 끈질기게 강청함으로 우리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라고··· 이러한 생각들이 발전하게 되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도 사람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때문에 우리의 철야 기도는 ‘철야농성’으로 변모하고, 금식기도는 ‘단식투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늘 ‘누구에게 어떤 자세로 기도하느냐’를 배우기 이전에 기도에 대한 말을 배우게 되고 기도의 바른 내용보다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먼저 배우게 된다. 이는 기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형식적인 면에 치우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의 ‘성의’(誠意)라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 혹은 ‘얼마나 오랫동안 하느냐?’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1:8 이하에 보면 이 사람은 친구이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강청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강청한다’는 말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떼를 쓴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청함’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계속해서 간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치를 피한다’, 혹은 ‘체면을 잃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볼 때 떡을 구하는 사람의 강청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는 핑계로 그에게 떡을 주지 않는다면 그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질 것이고 그 때문에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것을 걱정하며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체면, 부끄러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은 손님에 대하여 환대하는 것이었고(아브라함이 세 천사를 대접한 예), 적어도 같은 동네에서는 친구의 부탁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며, 하나의 약속이요, 불문율이며, 언약이었다. 그래서 여행자는 그 동네 전체에 대한 손님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참고 눅 9:51-55).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 비유를 본다면 지금 떡을 구한 이 사람은 그의 이웃에게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이행하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념으로 이해한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여 떡을 구하는 친구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에게 신앙 생활에 대한 어떤 교리를 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밝히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들이다. 누가복음 11장에 있는 이 비유 역시 초점은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에서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 나가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의 한 면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그 마을의 약속(언약)을 아는 자였기에 떡을 빌리러 온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들어줄 수 있는 신실한 친구와 같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신 하나님도 이와 같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신뢰할만한 분이시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들에 대해 성실하시며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약하시고, 그 언약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 섬기며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은 바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이는 누가복음 11:9 이하의 문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다. 우리가 기도로 끈질기게 매달리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게 되는가에 초점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초점이 있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시며 그 기도를 하는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그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란 우리가 간절히 요구하는 떼를 쓰기 때문에 응답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는다는 관계의 측면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자녀라는 사랑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은 응답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응답이라는 말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오해하면 안된다.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요구 한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나의 요구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오히려 내 요구와는 반대로 어떤 일을 이루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백성들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응답이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성취로 말미암아 형성된 관계라는 것을 안다면 무슨 일이든지 내 힘으로 어떤 일을 하다가 안되면 주님께 간구한다는 사고 방식이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 맨 처음,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찾아갈 수 있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여야 된다는 말이다. 모든 일의 중심에, 우리 전 생애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서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 안에서 우리의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아버지께 의뢰하는가 하는 문제를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언약의 하나님을 대상으로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에 기초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십자가 안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만족되어지지 않을 것은 없다. 무엇인가 불만족이 된다는 것은 나의 욕심이 개입된 결과이기 때문이다(김영대/200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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