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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일일말씀사경회 강론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종교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인 루터는 야고보서의 내용이 바울 사도가 강조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라는 복음과 충돌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2:24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는 말씀의 해석은 루터에게 난제였다. 행함을 통해 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중세 교회의 교리에 맞서 싸우고 있었기에 믿음에 행위를 더하는 어떤 주장도 경계하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하에서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다른 면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믿음으로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지를 말씀하고,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고 이해한다. 바울 사도가 구원의 뿌리를 말하였다면 야고보는 구원의 열매를 말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두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 믿음과 행함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 대부분은 이런 주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에 걸맞은 행위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마음껏 윤리와 도덕을 강조한다. 행함이 없으면 가짜 믿음이고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한다는 설교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나온 교인들이 스스로 믿음은 있다고 전제하고 행함을 보이려고 노력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니 행위가 나오도록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과 행함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행위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강조한 책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1). 야고보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보낸 편지이다. “흩어져”의 ‘디아스포라’는 ‘디아스페이로’(흩뿌리다)에서 온 단어로 ‘분산, 흩어진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것은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상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상태로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 11:4, 8)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강조한 것이다. 구약에서 언약을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언약을 성취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열두 지파”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지칭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 땅에서 흩어져 있다. 즉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형제들아”(4:11, 5:7, 9, 10), “내 형제들아”(1:2, 2:1, 14, 3:1, 10, 12, 5:12,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1:16, 19, 2:5)라고 “형제”라는 표현을 19회나 사용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가진 자이다(2:1). 형제란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 된 자로서 아버지와 같은 진리의 말을 하는 자이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육의 형제이나 “종”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잘 아는 종’으로서 복음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야고보서는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형제들, 곧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과 행함을 나누어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로 행하신 분 안에서 하나 되었기에 사람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하는 은혜를 확인시키는 책이다. 따라서 같은 진리의 말을 하는 믿음은 율법적 행위를 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이 16회, “행함”이라는 표현이 13회 나오는데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 중에서 우리가 오해하는 대표적인 구절들을 뽑아보면 2장에 집중되어 있음 알 수 있다. 그러면 먼저 2장을 중심으로 야고보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2)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4)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2:1).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의미한다(롬 3:22, 갈 2:16, 20, 3:22, 빌 3:9).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이어서 주어진 말씀이 윤리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한 것이다. “차별”이라고 번역한 ‘프로소폴렙시아’는 ‘편파심, 편견, 편애, 외모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프로소폴렙시아)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에베소서 6:9과 골로새서 3:25에서도 “외모로”라고 번역하였고, 사람은 외모, 겉으로 드러난 것, 곧 율법적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판단에 대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을 율법적 행위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아는 자는 문자의 율법으로 심판하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죽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눅 9:23).
그래서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4)라고 말씀한 것이다. 직역하면 ‘너희 안에서 서로 악한 생각으로 판단(심판)하여 재판관이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이다.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율법적 행위를 심판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2, 3절)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2, 3절)에 대한 비유를 말씀한다. “아름다운”의 ‘람프로스’는 ‘빛나는, 번쩍이는, 화려한, 밝은’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란 자기 행위를 자랑으로 삼아 빛나고 화려한 모습으로 드러내는 자를 의미한다. 6절에서는 “부자”(2:6)로 표현한다. 즉 율법적 행위의 자랑거리가 많아 자기 의가 충만한 자이다. “남루한”의 ‘뤼파로스’는 ‘더러운, 불결한’이라는 뜻이고, “가난한 사람”이란 ‘프토코스’로 절대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더러운 죄인의 상태, 즉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마 5: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마찬가지로 “낮은 형제”(1:9)의 ‘타페이노스’는 ‘낮은, 비천한, 겸손한’이라는 뜻이고, “부한 자”(1:10, 11), “부한 자들”(5:1)의 ‘플루시오스’는 ‘부유한, 부자’라는 뜻이다. 부자는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구원의 재료가 자기 안에 많으므로 자기 의가 충만한 자요, 낮은 형제는 율법의 문자적 행함은 아무 의미가 없고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살아날 수 없음을 아는 상태에 있는 자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율법적 행위로 인간의 의가 충만한 자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자의 비유로 인간의 행위로 판단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이 말씀은 믿음이 있다면 우리에게서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다면 영광의 주로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율법의 완성이라는 행함이 내 안에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행함이 내 안에 있지 않다면 율법적 행함을 할 수밖에 없기에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율법적 행위를 버려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긍휼을 베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라고 하였는데 “없는”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아니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행함의 완성이 아니라면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이고 멸망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2:17-18)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의 ‘코리스’는 ‘따로따로, 갈라져 있는, 떨어져서, 단독으로, ~을 제외하고’라는 뜻이다.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 코리스)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요 20:7)
그러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행함과 믿음이 따로따로 있다는 의미이다. 즉 행함이 믿음과 떨어져 단독으로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내 안에 주어졌다면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루신 그 행함도 내 안에 온전한 성취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라는 말씀에서도 “없는”을 ‘코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행함과 믿음이 따로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행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므로 그는 죽은 멸망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2)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을 위해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으로 비유를 들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 즉 인신 공양의 제사는 성경에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동물의 제사조차도 하나님께서 본래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마 12:7).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를 통해 드러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아들로 이삭을 주셨지만 그가 궁극적으로는 언약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그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의 행함은 믿음이신 예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며 그것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4)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말씀한 것이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으로 언약의 말씀을 보이게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행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의 말씀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라합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기에 그녀는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행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것이고 그 언약이 온전히 드러나는 행함은 곧 믿음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서도 라합과 정탐꾼의 관계에서 맺은 언약에 근거해 있음을 이렇게 말씀한다.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수 2:17-18)
그러므로 2장 전체는 우리에게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행함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이 땅에 오셨고,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까지 홀로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만 산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면 야고보서의 나머지 말씀들은 전부 문자의 율법에 매여 있는 우리의 죄성을 폭로하면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서론적으로 시험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결론 부분에서 병든 자가 장로를 청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시험”의 ‘페이라스모스’는 ‘시험, 시련, 유혹’이라는 뜻이다. 즉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에 대한 유혹을 의미한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헬, ‘파스 카라’)라는 표현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만 중간디포태로 원인자에 의해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상태를 말씀한 것이다. 따라서 “인내”(헬, ‘휘포모네’)란 ‘휘포’(~에 의하여, ~ 아래)와 ‘메노’(남다, 머물다)의 합성어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 은혜 아래 남도록 붙잡아 두시고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시험을 기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믿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이렇게 함으로 “믿음의 시련”(헬, ‘호 도키미온 호 피스티스’)을 통해 오직 내 안에 십자가만 남기신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그래서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7-18)라고 선언한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낳으신 자를 믿음과 행함이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4-16). 여기서 “고난당하는 자”(5:13), “병든 자”(4:14)는 같은 의미의 표현으로 15절에서 “사하심을 받으리라”라고 하였기에 죄와 연관된 표현이다. 즉 율법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루어 영생을 이루려고 하는 죄의 권세에 매인 자를 의미한다. “교회의 장로들”(5:14)이란 교회의 어른,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문자의 율법을 행하는 것에서 먼저 벗어난 자로 복음으로 새로운진 자를 지칭한다. 곧 위로부터 오는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믿음의 기도”(5:15), “의인의 간구”(5:16)는 십자가로 죄의 권세에서 빼내신 것에 근거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라는 것을 통해 성령께서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기도가 된다는 뜻이다.
결국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란 믿음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믿음 = 행함’, ‘행함 =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말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가 그 둘을 다르게 보고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다고 말하면서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 교회에 나왔다고 하여서 무조건 믿음이 있다고 인정한 데서 빚어진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4-5)
(202609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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