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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론 09
디모데후서 4:1-8
전제와 같이
성경의 장 절 구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너무 쉽게 장과 장 사이의 내용을 분리시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 하나의 편지라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장 절 구분은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찾기 위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3장 후반부에서 성령에 의해 기록된 말씀을 주신 목적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하시는 구원을 이루고,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함으로 똑바로 세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드시는 것에 있음을 밝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록된 말씀은 구약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구약의 말씀으로 율법을 전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전하였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 28:23)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이란 단순히 구약만 가리킨다고 보기보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신약의 말씀도 포함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제 기록된 그 말씀에 의해 복음이 바울 사도 자신과 디모데, 또한 교회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1절). “하나님 앞과 …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 얼굴 앞에서’라는 말이다(딤후 2:14).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 얼굴 앞에서’라는 표현을 추가하여 말씀한다. “엄히 명하노니”라는 말의 ‘디아마르튀로마이’는 중수디포태로 표현되었는데 ‘어떤 것을 관통하여 증언한다’라는 뜻으로 주변의 것으로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것을 직설적으로 밝히 증언한다는 의미이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말의 ‘쉬네코’를 수동태로 썼으니 ‘결합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었다는 것은 말씀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증언하는 자가 먼저 하나님 얼굴 앞에 다른 하나님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그리스도 예수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자에 의해 가려져 있던 말씀을 밝히 드러내어 증언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으로 묘사하였는데 산 자와 죽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분된다는 의미이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 5:24-27)
“그가 나타나실 것”이란 ‘에피파네이아’는 ‘나타남, 출현, 계시’라는 뜻인데 번역상 우리 성경에는 마치 미래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뉘앙스로 보이는데 흔히 말하듯 재림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몸 된 교회로 드러나시는 것’(출현)을 의미한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 왕국, 곧 “아들의 나라”(골 1:13)를 가리킨다. 정리하자면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여 판단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와 그 왕국을 밝히 드러내고 증언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와 왕국을 밝히 드러내시기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2절)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너”는 진리의 아들이 된 자를 가리키고, “말씀”은 ‘호 로고스’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전파하라”라는 말의 ‘케륏소’는 ‘고지하다, 알리다, 선포하다’라는 뜻인데 과거 명령형으로 썼다. “때를 얻든지”의 ‘유카이로스’는 문자적으로 ‘좋은 시간’이라는 말이고, “못 얻든지”의 ‘아카이로스’는 ‘시간이 아니다’라는 말로 한마디로 하나님의 때(시간)와 하나님의 때(시간)가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항상 힘쓰라”의 ‘에피스테미’는 ‘에피’(옆에, 곁에)와 ‘히스테미’(세우다)의 합성어로 ‘곁에 두다, 옆에 세우다, 가까이에 있다’라는 뜻으로 과거 명령형이다.
“오래 참음”의 ‘마크로뒤미아’는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참는 것이고, “가르침”은 복음을 의미하고, “경책하며”는 ‘엘렝코’로 ‘드러내다, 폭로하다, 깨닫게 하다’라는 뜻이고, “경계하며”의 ‘에피티마오’는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견책하다, 벌하다’라는 뜻이며, “권하라”의 ‘파라칼레오’는 ‘파라’(곁에)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 기본적으로 ‘자기 곁으로 부르다’를 의미를 담고 있는데 ‘초청하다, 권면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이 있다. 이 표현 역시 과거 명령형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건물 교회에 무조건 사람을 많이 모으는 전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곁에 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이든이 아니든지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라. 모든 일에 오래 참아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곁에 초청하여 복음으로 가르쳐 (때로는) 죄를 폭로하고 (때로는) 존경를 표하라. 이 모든 일은 주께서 하시는 일로 이미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과거 명령형을 사용하였다.
“3 (왜냐하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3-4절). “때가 이르리니”라는 표현은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로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이라는 의미이다. “바른 교훈”이란 ‘평안, 안식의 복음’이라는 의미이다(참고 딤전 1:10). “받지 아니하며”의 ‘우 아네코’는 ‘받지 않는다, 참지 않는다, 견디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허탄한 이야기”란 ‘호 뮈도스’로 1:4에서 말씀한 ‘신화’를 말한다.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때가 되면 복음 듣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개인적인 욕심들을 따라 귀를 간지럽게 하는 자기의 개인적인 선생들을 모으고 또 그들은 그 진리 들음을 확실하게 외면하고 거절하여 그 신화들 위에서 스스로 빗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말세, 곧 종말의 상태이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6-21)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5절). “신중하여”라는 말의 ‘네포’는 ‘술 취하지 않다, 정신을 차리다’라는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8에 보면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네포)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하였는데 “낮에 속하였으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진리에 속하여 있기에 술 취함으로 상징되는 비진리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엡 5:18).
“전도자”의 ‘유앙겔리테스’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복음 전도자’라는 말로 번역된다. 에베소서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 번역하였는데 주님께서 직무를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집으로 완성한다는 의미이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유앙겔리테스),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6-7절). “전제”란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인데(민 15:1-10) 어린 양이면 사분의 일 힌, 숫양이면 삼분의 일 힌, 수송아지이며 이분의 일 힌으로 제물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즉 포도주를 붓는다는 것은 제사하는 자가 죽음으로 제물의 일부가 되어 그 제물을 덮고 그 안으로 녹아 들어간다는 뜻이다. 곧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죽어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믿음의 희생 제사와 믿음의 섬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섬김에 합류됨의 의미로 표현하였다(빌 2:17). “떠날”이라는 말의 ‘아날뤼시스’는 ‘(사슬이나 속박)에서 벗어남, 풀어줌, 떠남’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육의 장막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하늘의 영원한 집에 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선한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이다(딤전 1:18, 6:12).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동참한 싸움이기에 “나의 달려갈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의 길로 진리의 아들이 된 자로서의 길이다.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은 ‘그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6절에서 “나의 떠날 시각”이란 하나님의 때를 의미한다.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8절). “의의 면류관”의 ‘스테파노스’는 ‘그 의의 왕관’이라는 말이고, “예비되었으므로”의 ‘아포케이마이’는 ‘임하다’라는 뜻으로 중수디포태로 표현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에 그 안에서 함께 왕 노릇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왕 노릇하는 것이 선포하는 것이다(계 20:4-6).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라는 말씀은 바울 사도 뿐만 아니라 디모데, 곧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 곧 교회도 함께 누리는 생명의 상태가 되었음을 표현한 것이다(여기서 “나타나심” 역시 1절의 ‘에피파네이아’와 같은 단어이다). 사도는 특별하고 우리는 그와 차별이 있어서 다른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은 차별 없는 의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202504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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