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이적

13.마태복음 14:22-33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불편한 진리 2021. 11. 7. 17:35

https://youtu.be/HCTaIpurhQw

 

 예수님의 이적13_물 위를 걸으심

마태복음 14:22-33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걷는 이적을 보여주셨는데 이 이적은 세 복음서가 동일하게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다음에 기록하였다. 마가복음 6:45-52, 요한복음 6:16-21에 기록되었는데 베드로가 잠시 물 위를 걸었던 것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이 유일하고 또 본문이 전체적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었으므로 우리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본 이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2-24절). 왜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내실 동안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을까?

마태복음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4-15)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무리들은 생존을 해결하는 선지자 모세가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기에 제자들을 억지로 강요하여 속히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먼저 가게 하셨다. 무리들과 제자들을 분리하셨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무리들은 이 이적을 경험하고서도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6-27)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리들에게는 이적 자체도 썩는 양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배를 타고 먼저 가게 하셨고 그 과정에서 풍랑으로 인한 고난 가운데 두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바다 위를 걸어서 가셨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5-27절). 그렇다면 이 이적이 무슨 의미인가?

흔히들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을 구하러 오셨듯이 예수님은 세상의 풍랑에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돌보시며 또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은 자연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이런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야단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해석한다.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이런 이적을 체험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또한 우리 스스로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세상의 풍랑, 즉 세상에서 오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의 구원인가?

이 이적에서도 죄인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26절에 보면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이라고 하였다. 인간들의 사고체계 안에서는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제자들은 환상(우리 성경에 유령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환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이라고 소리쳤다. 또한 “밤 사경”이란 일몰 시간(오후 6시)쯤부터 밤을 3시간씩 나눈 시점을 의미한다면 사경은 새벽 3-6시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새벽녘까지 육지도 당도하지 못하고 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대부분이 어부출신이었지만 거스르는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은 단순히 바다 위를 걷는다는 놀라운 이적 자체를 보여주셨다는 정도가 아니라 중요한 메시지를 나타내고 싶으셨을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빈들”( 마 14:13, 헬, 에레모스:광야), “유월절”(요 6:4), 시내산을 연상시키는 “산에 오르사”(요 6:3), “떼로 백 명씩 또는 오 십명씩 앉은지라”(막 6:40/눅 9:14) 등의 표현은 기록자들이 의도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을 재현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진리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이었다면 이제 “게네사렛 땅”(34절)으로 가시는 것을 통해 과거 이스라엘이 바다를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간 구원의 사건을 다시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은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사건을 예수님 자신이 온전히 성취하시는 일로 나타내셨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갈릴리 바다’ 혹은 ‘호수’(막 7:31, 요 21:1)로 기록하는데 본문에서는 분명히 동일하게 “바다”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셔서 궁창 아래의 물에서 뭍이 드러나 세상이 되었고 그 세상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죄의 권세에 매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궁창 아래의 물인 바다란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죄악 된 마귀의 권세를 상징한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실 때에 바로의 군대는 바다에 던져 넣으셨으나(출 15:3-5) 이스라엘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건넜다(출 15:19).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구원은 원수들을 심판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 지난 것을 바울 사도는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2)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세례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신이 죽고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러한 의미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셨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마 4:15)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그것을 넘어서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막 10:38-39). 즉 예수님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십자가 죽음을 성취하시겠다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이적은 물 세례를 통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인과 같이 되셨지만 십자가 죽음이라는 세례를 통해 죄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시고 온전히 성취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표적이다.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절)라고 하셨는데 똑 같은 표현을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 6:50, 요 6:20)라고 번역하였다. “내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인데 ‘나는 ~이다’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에고 에이미’ 선언은 출애굽기에 나온다. 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보내셨는가를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우리 성경에 “스스로 있는 자”(예흐예 아쉘 예흐예)라고 번역 하였는데 직역을 하면 ‘나는 나다’라는 말이다. 즉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바다의 풍랑을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고 믿었다(시 107:25-30, 욥 9:8, 시 29:3, 합 3:15). 그래서 본문 33절에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뜻이다(요 5:18).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하면서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록을 진전시키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있다(마 27:54).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내니”라고 하신 표현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 바다 위를 밟으시며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통해 볼 때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셨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9-31절).

여기서 “믿음이 작은 자여”라고 하신 말씀은 믿음이 작다, 혹은 적다는 식의 분량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의심하는데 믿음이 작고 크고 할 수 있는가?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심으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바다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며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도록 하신 이 일을 통해 믿음이 없는 상태가 모든 제자들의 상태요 오늘날 우리들의 죄인 된 상태라는 것을 폭로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것은 “바다 위”(25,26절)였고 베드로가 걸었던 것은 “물 위”(28,29절)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건지셨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라”라고 말씀하신 것에 의한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에 의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믿음이시라는 의미이다. 즉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실 일이라는 표적이라는 뜻이다. 실로 예수님은 바다에 속한 자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자였기에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분이었다(참고 계 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바다 위를 걷는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이 떡, 진리의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되시기 때문에 그분이 믿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분과 하나 된 상태라면 이제 더 이상 마귀의 권세에 매여 바다 속에서 멸망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먹는 바다 위의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인생은 누구나 다 ‘나는 나다’라는 생각으로 산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바다에 사는 존재이다. 예수님이 없는 상태의 ‘나’는 그저 세상의 죄악 된 권세에 매여 사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존재에게 진짜 “나”라는 분이 나타나셨다. 그분이 나타나시니 비로소 노아 홍수 때와 같이 내가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존재이고 홍해에 수장된 애굽의 군대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자기 자신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그분이 주신 떡을 생존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먹는 자는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이지만 생명의 떡으로 먹고 그 떡의 의미를 아는 자는 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자이고 바다 위를 걷는 자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 안에서만 바다라는 세상에서는 죽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즉 죄악 된 권세를 이긴 상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성도이다(202111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이적13.마1422-33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202111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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