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
다툼
사도행전 15:36-41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율법에 관한 문제를 정리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대에서 온 자가 안디옥 교회에서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 여러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여 심사숙고했습니다.
문제에 대한 결론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 확고한 진리였습니다(행 15:11).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차원에서 우상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스스로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절제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정해진 기본적인 새로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율법적인 요소를 가미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이라는 것도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언해서 말하자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자에게 어떤 율법을 들이대고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염려하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에 대해 어떻게 통제가 가능한가? 방종으로 가기 쉬운데 자기 마음대로 살면 그게 어디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방종으로 내몰게 될까봐 아직도 구약의 율법이 살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방종으로 나가게 될까봐 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쳐야 하고 그 율법에 묶어 놓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인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으로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발상입니다.
교회의 통제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결코 방종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사는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방종이라는 것도 우리의 시각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어긋나 있다는 시각 아닙니까? 그러므로 방종이라는 것이 주님의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율법이란 우리의 죄를 보여주고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상과 어떻게 구별되고 다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흔히 세상과 달라야 하고 구별된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에서 차이가 나고 구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건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든지 아니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를 안믿는 자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보면 마가 요한의 일로 인해서 심히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다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도여행을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전에 복음을 전했던 각 성에 형제들이 어떠한가 하여 다시 가보자고 했습니다. 여기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사도행전 13:5에 보면, 1차 전도여행 때에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3:13에 의하면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왜 돌아갔는지는 대해서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3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마 전도여행이 힘들어서 다시 돌아갔기 때문에 2차 전도여행에서 따라 나서는 마가 요한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다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마가 요한과 동행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마가 요한과는 동행하지 않기 위해서 바나바와 갈라서서 따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이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조금 다투어서 유감이지만 결과는 하나로 갈 전도여행이 두 개로 나누어져 갔기 때문에 더 많이 선교할 수 있어서 유익이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로마서 8:28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물량적으로 많이 전도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교회가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맨날 싸워야 합니다.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말한 다른 한 본문을 봄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1:12-18입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 본문을 볼 때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서로 다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복음이 가리워진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그것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조차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거나 차단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이 어떤 짓을 하든지 그 인간의 행위가 주님의 복음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복음 그것은 주께서 십자가로 친히 홀로 이루신 기쁜 소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홀로 이루셨기 때문에 홀로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주님의 복음에 도움되는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도록 자기 백성들을 사용하시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증인입니다. 그 증인의 역할도 우리 자의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히 주장하실 때에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어떤 방도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것으로 인해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게 고난이 오는가 오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신경쓸 문제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본문에 좀 더 나가보면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화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19-21)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죽고 살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고 있다면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은혜입니다. 또한 죽는다면 죽음이라는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 안에 사는 분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 때문에 바울 자신은 부름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 떄문에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고 그 복음이 전해지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다른 기쁨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판단을 함부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님이 일하십니다.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우리는 따라갈 뿐입니다.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율법이나 아니면 나 개인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 자체를 판단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얽매여서도 안 되고 또한 율법에 얽매일 수 없는 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다시 확인된 분명한 진리,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이 분명한 사실에 어떤 율법도 추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다는 것은 서로의 성격차이일 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격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사람의 성격이 바뀝니까? 인격의 변화가 과연 가능합니까?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격의 변화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때에 변화된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셔서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그 순간에 성령의 열매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변화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성령에 의해 맺혀질 뿐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다르고 원리가 다르다는 차원에서 다르다는 것이지 세상에서 무엇을 지키고 사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목표를 가지고 주의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를 위해서 살고 그분을 보여주는 차원으로 산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줌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급한 성격으로, 어떤 사람은 느긋한 성격으로, 어떤 사람은 꼼꼼한 성격으로, 어떤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성격의 차이로 인해 충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가 나쁜가 혹은 어떤 사람이 복음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실 뿐입니다. 판단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싸워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싸우더라도 싸운 것으로 결말을 맺지 말고 주의 은혜를 되새기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후에 마가 요한을 신실한 사역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는 것은 윤리와 도덕 속에서 또는 내게 얼마나 잘해주는가 하는 자기 기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잘해주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늘 십자가에 자신을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자신이 죽는 십자가에 자신을 비교해 보아야만 나는 한 일이 없고 주님의 은혜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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