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7:1-25
아간의 범죄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고 했다. 이 사건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죄를 우리는 쉽게 물건을 훔쳤다는 아간의 행위로 본다. 그래서 자신은 아간과 같은 행위가 없다는 것으로 아간의 죄와는 상관없이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아간의 범죄에서는 제외되어 있는 의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란 죄와 분리를 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한 많은 사람들은 죄와 분리된 삶을 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도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포장을 해서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는 자기 죄를 숨기고 가려서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면 의인으로 착각하는 위선자들만 득실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이기고 있다거나 죄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착각을 가질 때가 많다. 죄를 행위로만 보기 때문에 죄라고 생각되는 행위가 자기의 의지와 노력여하에 따라 억눌릴 때 그것을 죄를 이기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긴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예수님의 힘을 빌려 죄를 내 속에서 몰아내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있는 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말씀을 통해 날마다 죄를 분명히 보여 주시는 것이다.
본 장은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아간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보여 주신다. 때문에 아간 한 사람이 범죄를 하였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간 한 사람의 죄를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취급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아간의 범죄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문제로 볼 것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간 한 사람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의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간이 범죄 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21절)라고 했다. 아간이 훔친 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액수나 양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중요한 문제이다.
6장에서 살펴보았던 여리고 성에 대한 승리는 과연 누구의 승리였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였다. 하나님이 이기신 것이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여리고를 이긴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여리고 성의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가? 그것은 가나안 땅에서의 첫 전쟁으로 처음 것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나머지 모든 전쟁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하나님이 승리하신 전쟁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 손을 댄다면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승리로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소유로 삼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승리를 자기가 스스로 가져오려는 어리석은 짓이다. 여호수아 6:18에 의하면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바친 전리품을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이 취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말은 사람과 상대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상대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신 것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약속을 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스라엘을 통해 어떻게 실현하시는가? 그것은 곧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가나안 땅에 집어넣으셔서 어린 양의 희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일하신다.
그런데 아간은 하나님의 승리, 즉 하나님께서 낮아지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여 친히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탐욕에 의해 전리품 몇 가지를 취함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거부하고 자기 승리로 가져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범죄에 대하여 “나의 언약”을 어겼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11절).
여리고를 함락시킨 이스라엘은 이제 아이 성을 공격하려고 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아이로 보내 그 땅을 정탐하라고 한다. 아이 성을 정탐한 자들이 돌아와서 이르기를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3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4, 5절)고 하였다.
이렇게 된 원인을 지금 우리는 단순히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이스라엘은 강한 여리고를 이겼으니 아이 성은 보잘 것 없는 성이었고 힘의 논리로 보았을 때에 적은 수로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가나안 땅의 전쟁을 힘의 논리로 보고 있다. 3천 명 정도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여리고에서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긴 결과였다.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치신 것은 약속의 땅에 비언약 백성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신 차원이었다. 거룩한 땅에 더러운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거룩한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여리고 성, 아이 성의 사람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자들이라면 여리고 성이나 아이 성의 사람이나 동일하게 비언약 백성이라는 것이다.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진노하셨다는 것을 아이 성의 패배를 통해 보여 주신 것이었다.
레위기 27:28, 29에 의하면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은 아간을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16-18절에 보면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 아간을 뽑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뽑은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속에서 아간을 바로 뽑아내시지 않고 지파, 족속, 가족 그리고 한 개인에게로 좁혀갔는가 하는 것이다. 아간을 바로 뽑아내실 수도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번거롭게 하신 것은 아간을 뽑아내서 그를 징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아간을 통해 인간의 죄를 말씀하고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스라엘 역시 가나안 땅의 존재와 다름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아간과 같은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인간이 자신의 실패를 알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녀를 키우는 것도 패자부활전이라고 생각하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인데 하지 못했던 것, 내게서 부족하였던 것 이런 것들을 내 자식에게서 더욱 보완하고 보강해서 더 나은 또 다른 나 자신을 실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 자식 교육이다. 비록 나는 실패했을지라도 내 자녀는 실패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를 통해 자신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금 성공하지 못해고 또 다른 자신을 실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오히려 실패한 못난 자로서 십자가를 붙잡는 죄인을 원하신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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